▲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열린 민주성회에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청에 진입해 들어가 무조건 보인대로 쐈다. 투항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손들고 나오는 사람을 그대로 있으라고 할 수 없었다. 시체가 드문드문 널려 있었다. 한 방에 서너 명 정도씩 있었는데 17구는 분명히 훨씬 넘었다. 시체는 보병부대(20사단)가 끌어내고 있었고 방마다 시체가 널려 있었다. (주석 11)
박병준(17세, 재봉사)도 YMCA에서 지원병으로 대기하던 중 새벽 2시경 도청으로 가서 카빈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도청 뒤 경찰국 건물에 12명과 함께 배치되었다. 계엄군이 30미터 전방까지 왔으나 총을 쏘지 못하고 겁이 나서 경찰국 건물 지하실에 피신해 있다가 다리에 총을 맞고 체포되었다. 이렇게 하여 후문 쪽 경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주석 12)
새벽 4시경 11공수여단 특공대는 관광호텔과 전일빌딩을 향하던 중 도청 가까이 도착했다. 충장로 쪽에서 도청을 우회하여 분수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시민군 기동타격대 1조 조장 이재춘이 분수대 앞쪽 화단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고등학생 한 명이 실수였는지 카빈을 한방 공중에다 발사했다. 총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계엄군의 집중사격이 쏟아졌다. (주석 13)
YWCA 2층 강당에서 보초를 교대하고 잠자리에 누우려는데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도청에 있던 사람이 실탄을 가지고 와 지급하면서 "돌고개 쪽에서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금 후 도청 쪽에서 LMG와 M16 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30분쯤 정도 지나자 천지를 진동하던 총소리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내가 있던 YWCA 앞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캄캄한 밖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야말로 동족끼리의 한맺힌 전쟁이었다.
우리는 사방을 포위당한 상태에서 얼마간 응사했지만 보이지도 않는 적을 향해 계속 총을 쏠 수 없어 중단했다. 동틀 무렵까지 일방적으로 총을 갈긴 계엄군에 의해 그곳에서 시민군 2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당했다. YWCA 1, 2층에 있던 시민들이 날이 밝자 항복을 했으나 나는 그때 항복하면 분명히 몰살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삼엄한 계엄군의 경계를 무사히 벗어나기가 어려워 인근에 있던 민가로 가서 이틀을 숨어 지냈다. 그동안 라디오에서 폭도들은 자수하라고 떠들어대고, 내가 숨어 있던 집에까지 계엄군이 들어오자 집주인 아저씨가 자수를 권고하고 신고를 하여 상무대로 잡혀가게 되었다. (구술 : 김한중) (주석 14)
주석
8> 1989년 1월 27일, 광주특위 제26차 회의 청문회에서 정상용의 증언, 정상용 외 앞의 책, 312쪽.
9> 1989년 2월 23일, 광주특위 제29차 회의 청문회에서 박남선의 증언, 정상용 외 앞의 책, 312쪽.
10> 1989년 2월 23일, 광주특위 제29차 회의 청문회에서 김태찬의 증언, 정상용 외 앞의 책, 312쪽.
11> 당시 3공수 11대대 제1지역대 하사로서 특공조의 일원이었던 홍아무개 중사가 평민당 광주특위 위원과의 인터뷰 중에서 밝힌 내용임, 정상용 외 앞의 책, 312쪽.
12> 황석영 외, 앞의 책, 423쪽.
13> 앞과 같음.
14> 『광주5월항쟁전집』,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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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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