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려면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했다. 지영씨 주변에 단 한 사람이 없었다. 지영씨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미혼모를 돕는다는 모든 기관에 전화를 했다. 건강가정증진센터 등 수십 군데의 정부기관에 연락을 했지만, 매뉴얼이 없기 때문에 도와 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세상이 온통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이준혁
맞춤형 돌봄 없는 사각지대에서 위기 겪는 미혼부모와 아기
그러는 가운데서도 시간은 흘러갔다. 출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냥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주 절박한 현실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병원에서 아기를 낳으려면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했다. 지영씨 주변엔 사람이 없었다. 만삭이 다 되어서 겨우 어머니에게 얘기했지만 늦게 알린 것 때문에 굉장히 화를 냈다. 아픈 아버지를 돌봐야 하는 엄마에겐 도움을 청할 수 없었고, 엄마의 반응이 그랬기 때문에 오빠에게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무렵 오빠가 결혼을 했다. 그래서 더욱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오빠의 결혼식에 참석도 하지 못했다.
지영씨는 출산 당일 보호자를 구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서 미혼모를 돕는다는 모든 기관에 전화를 했다. 건강가정증진센터 등 수십 군데의 정부 기관에 연락을 했지만 매뉴얼이 없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민간단체인 미혼모 네트워크에 연락했는데, 그곳에도 그런 지원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인 시스템은 없지만 전화 받은 분이 돕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지영씨는 기도했다. 제발 아기가 평일 낮에 태어나서 그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국 일요일 새벽 진통이 와서 그날 낮에 아기가 태어났다. 그분은 멀리서 택시를 타고 와주셨다. 이 이야기를 하며 지영씨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저는 그나마 나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10대, 20대에 이런 일을 겪는다면 정말 더 막막하겠지요. 실제로 저 역시 조마조마했어요. 만약 위급한 상황이 되어 제왕절개라도 했다면 병간호를 받아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출산 전부터 겪고 있던 지영씨의 정신적 위기는 출산 후에도 계속되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한 채로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온종일 아기를 돌봤다. 어려움을 터놓고 나눌 사람도, 잠깐의 휴식을 위해 아기를 맡길 사람도 없었다. 외출할 엄두도 나지 않았고, 자신의 상태를 직시할 힘조차 없었다.
지영씨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아기가 만 12개월이 되어서였다. 이때가 되면 모든 아기가 의무적으로 영유아 검진을 받게 되어 있다. 대근육, 소근육, 인지, 언어, 사회성 등 다섯 가지 영역의 발달 상태를 검사하는데, 지영씨의 딸은 소근육을 빼고 네 가지 영역이 모두 심각한 상태이니 '발달지연 심화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이런 경우 발달장애일 가능성이 70% 이상이라 했고, 빨리 종합병원에서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때서야 지영씨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까지 세상이 무너질 듯 힘들어하는 동안 아기는 나보다 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그간의 모든 고통이 사치처럼 여겨졌다. 지영씨는 비로소 아기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면했다. 그간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씻기는 것을 제외하고 아기에게 해준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생후 1년 동안 주 양육자와 형성해야 하는 '애착'은 당연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헌신적인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아기는 정서적으로 완전히 방치되어 홀로 누워서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위기는 아기에게 고스란히 정서적·신체적 공백을 남겼다. 아기는 주변을 관찰하지도 않았고, 잘 울지도 않았으며 낯가림도 전혀 없었다. 보통의 아기라면 돌 때쯤 옹알이도 하고 손뼉도 치고 조금씩 걷기도 하는데, 아이는 그 모든 자연스러운 것 중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낳아 기르기로 했으면 잘 길렀어야 하는데 태교부터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했나? 정말 엄마로서 아기에게 몹쓸 짓을 했구나.'
종합병원에 예약했지만 3개월 정도 지나서야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아기의 위기 앞에서 지영씨는 자신의 병도 잊었다. 그때부터 아기에게 정말 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인지적인 면이 걱정되어서 쉴 새 없이 책을 읽어줬다. 아기는 빠른 속도로 변해갔다. 3개월 후 검사를 받게 되었을 때는 언어나 인지면에서 정상 범주를 넘어섰다. 그러나 대근육 발달은 단기간에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아기는 종합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19개월 만에 처음 걸음마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아기는 어린이집에 맡겨도 될 만큼 자랐다. 병원치료도 어느 정도 끝나가니 지영씨도 취업해서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직장을 그만둘 때 했던 계산대로 모아둔 돈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영씨는 취업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아르바이트조차 구할 수 없었다. 아이가 계속 아팠다. 감기를 심하게 앓았고 천식도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구해 일하다가도 아이가 아프면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일터에 미안해 한 달 계약의 아르바이트도 포기했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했지만, 구하기도 어렵고 그렇게 일하다가도 아이가 아파 서둘러 일터를 떠나야 했다.
아이가 말도 하고 걸음도 걷게 되면서 한시름 놓고 있었는데, 차츰 다른 문제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생후 1년간의 정서적 공백이 너무나 컸던 모양이었다. 지영씨의 노력으로 언어발달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빠른 축에 속했지만, 딸은 목이 말라도 '엄마 물 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물 줄까'라고 지영씨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엄마가 고립된 동안 사람들의 일상 대화를 듣지 못했기에, 엄마의 말을 따라 할 줄만 알았던 것이다. 지영씨는 부랴부랴 아이를 놀이 치료에 데려가기 시작했다. 가끔 아스퍼거 증후군(사회성 발달장애) 같은 것은 일찍 알 수 없다며 검사를 받아보라는 얘기를 들으면, 그는 또다시 죄책감과 걱정의 늪에 빠져 정신적인 문제들을 잠깐씩 겪기도 한다.
모아둔 돈이 바닥이 나자 지영씨는 2018년 9월, 양육미혼모 보호시설에 들어갔다. 그러나 3개월만인 2018년 12월 법적인 문제로 그곳을 나와야 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임시거처에 머물던 지영씨는 2019년 2월 다시 지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머니가 지영씨 앞으로 들어놓은 적금이 마침 만기가 되었고, 그 돈으로 지영씨는 작은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손녀를 품에 안고 끝없는 눈물을 흘렸다.
약자들의 연대, 힘들면 손잡고 걷는다
여전히 형편은 어렵다. 아이는 수시로 감기, 폐렴, 천식을 앓고 정서적인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지영씨의 정신적인 어려움 역시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 지영씨는 자신에게 힘이 있음을 느낀다. 미혼모 단체에서 하는 행사에도 참여하고 미혼부모·한부모 가정을 돕는 단체인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의 품'(아래 아품)에서 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