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국가보훈처)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국가보훈처)
박종근
정부는 2008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운암 김성숙 선생을 선정하고 추모하였다.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행사이다. 다음은 정부가 기술한 자료이다.
운암 김성숙(雲巖 金星淑)
법 명 : 태허(太虛)
아 호 : 운암(雲巖), 본관은 상산
생년월일 : 1898년 평북 철산 생. 1969년 4월 12일 별세
이명(異名): 창숙(昌淑), 성암(星巖), 규광(奎光)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2008년 '4월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
운암 김성숙 선생은
ㆍ김성숙은 님 웨일즈 『아리랑』에 나오는 금강산에서 온 붉은승려 '김충창'으로 묘사되고 주인공인 김산(장지락)의 정신적 스승이다.
ㆍ1942년 임시정부의 내무차장(內務次長).
ㆍ1943년 2월 박찬익(朴贊翊)ㆍ최동오(崔東旿)ㆍ유림(柳林)과 함께 임시정부 외무부의 외교연구위원회(外交硏究委員會)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대열강외교활동(對列强外交活動) 및 외교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ㆍ1943년 4월 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선전계획의 수립, 선전진행 방침 논의.
ㆍ1945년 12월 1일 같은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진(洪震)ㆍ조성환(曺成煥)ㆍ신익희ㆍ조소앙 등 13명과 이계헌(李啓賢)ㆍ서상열(徐相烈) 외 9명을 포함한 23명 환국.
ㆍ광복 후에는 혁신정당을 조직하여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별세하였다.
운암 김성숙 선생 약전
1918년 - 봉선사로 옮겨서 불교교리를 공부, 손병희와 불교계 인사인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
1919년 - 봉선사 승려로 있을 때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비밀리에 독립문서를 만들어 일반 대중에게 살포하다 체포.
1923년 - 북경으로 건너가 민국대학에 입학. 장건상 등과 더불어 혁명단체인 '창일당'조직, 『혁명』이란 기관지를 발행 및 배포.
1937년 - 조선민족전선연맹(민선)을 조직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며 기관지 『민족전선』을 편집, 간행함.
1939년~1941년 - 조선민족해방동맹은한국광복전선과조선민족전선연맹의발전적 해체를 통해 임시정부로 총단결할 것을 주장. 한중문화협회에 상임이사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 임시정부 국무위원.
1945년 -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환국. 해방 후 좌우합작 주장.
1955년 - 5ㆍ16 이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옥고.
1967년 - 신민당 운영위원 피선(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치생활).
1968년 - 신민당 지도위원 선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