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67〉 진파리 제4호 무덤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둥근 고리(天門)에서 이 세상 만물이 태어나고 있다. 이렇듯 고구려 벽화에는 이 세상 만물의 기원이 천문(天門)이라는 것을 곳곳에 그려 넣었다.
김찬곤
2014년 전호태는 《비밀의 문, 환문총》(김영사)을 내며, 이 둥근 고리무늬를 불교의 '윤회'로 해석한다. 그는 불교의 세계관으로 환문총을 본 것이다. 하지만 그 뒤 불교 미술 문양 가운데 환문총 같은 고리무늬는 찾아보기 힘들다. 비슷한 것으로는 보주(寶主)를 들 수 있지만 보주는 이것과는 다르다. 만약 이것을 보주로 본다면 고리무늬 둘레에 있는 다른 무늬와 총체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데, 그도 아니다.
고구려 벽화는 불교 이전의 세계관 내지는 내세관이라 할 수 있는데, 전호태에게는 불교 이전의 고구려 세계관이 없다. 또 내세관도 문제가 있다. 전호태는 고구려 벽화에 생활그림이 많은 것을 두고, 전생에서 귀족으로 살았듯 내세에 가서도 귀족으로 살고 싶은 욕망을 그렸다고 본다.
하지만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고구려인들에게 이런 내세관이 있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유물에서도, 미술에서도 없다. 한반도 사람들에게 내세관은 불교 이후의 세계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주 옹관, 원통형토기, 고인돌을 다루면서 아주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벽화를 총체로 보면 전호태와 같이 해석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없다. 고구려인들은 천문에서 태어나, 이 세상을 살았던 삶을 벽에 그리고, 죽어 다시 천문으로 돌아간다는 내세관을 천장에 그렸다. 그래서 〈사진165〉 안악 2호분 무덤처럼 천장에 천문을 그린 것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가장 중요한 세계관은 천장에 있다. 벽화의 시작도 그 끝도 천장 그림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우리 학계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 벽화는 무덤 '벽'이 아니라 망자가 누워서 바로 보이는 천장 그림이 핵심이고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다.
〈사진165〉 안악 2호분을 보면 한가운데 천문(天門)이 있고(이것은 연꽃이 아니다! 연꽃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사방에 둥근 고리 무늬 천문(天門)이 네 개 있다. 이것은 사방오주(四方五州), 다시 말해 동서남북 사방과 동서남북 그리고 중앙의 다섯 들판(五州)를 뜻한다. 이 세상 사방오주의 만물이 하늘 구멍 천문에서 비롯했고, 이 천문에서 나왔으니 죽어 다시 천문으로 돌아간다는 내세관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이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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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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