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위치.
구글 지도
일본인들이 류큐왕국이라 불렀던 유구왕국은 이 당시에는 독립국이었다. 동아시아해역의 중간쯤인 이 나라는 동아시아의 남과 북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했다. 조선 전기만 해도 '동아시아판 싱가포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호카마 슈젠이 집필하고 심우성이 번역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는 조선시대 전기나 중기인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에서 "류큐왕국이 성대하게 번영하여 무역국가로서 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유구왕국의 대외관계는 독특했다. 청나라와 일본 양쪽에 사대(事大)를 했다. 일본 영토로 편입되기 전인 1869년까지의 대마도(쓰시마)가 조선과 일본 양쪽을 황제국 혹은 상국(上國)으로 떠받든 것과 같았다.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섬나라에서 나타나기 쉬운 외교 형태였다. 이렇게 양쪽에 동시에 사대하는 것을 역사학계 용어로는 양속(兩屬)이라 한다.
유구가 청나라와 일본에 양속했다지만, 엄밀히 말하면 청나라 중앙정부와 일본 지방정부에 양속하는 것이었다. 일본 쪽 당사자가 중앙정부가 아니라 사츠마번이었던 것이다.
사대관계의 핵심은 황제국이 신하국 군주를 책봉하는 것과, 신하국이 조공하면 황제국이 회사(回賜, 답례)하는 것이었다. 이런 책봉 및 조공·회사가 유구왕국과 청나라 및 사츠마번 사이에 존재했다. 중국 대학 교재인 장웨이화(장유화)의 <중국 고대 대외관계사>는 "유구에서 새로운 왕이 계승할 때마다 청나라 사신이 가서 책봉과 축하를 해주었다"고 말한다.
일본 교과서에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야마가와 출판사가 2007년에 펴낸 고교용 <세계의 역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아래의 '나하'는 유구왕국의 중심지였다.
"15세기에 츄우잔왕이 통일한 유구왕국은 명나라에 조공을 함과 동시에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중국·일본·조선·동남아시아를 묶는 남중국해 무역을 중계하면서 번영을 누렸다. 나하는 동아시아의 주요 무역시장의 하나였지만, 얼마 안 있어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진출로 인해 쇠퇴했다. 17세기에는 처음으로 사츠마번에 복속했는데,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계속했다."
조선은 중국에 사대했지만, 엄연한 독립국이었다. 중국 송나라(남송)도 여진족의 금나라에 사대했지만, 그 역시 독립국이었다. 유구 역시 청나라와 사츠마번에 사대했지만, 이 역시 독립국이었다. 사대관계는 약한 나라와 강한 나라 사이의 외교관계였다. 국제관계였지 국내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사대관계를 명분 삼아 1871년 사건에 개입했다. '유구 땅은 우리 땅이므로, 우리가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 유구를 상대한 주체는 중앙정부인 데 반해 일본에서 유구를 상대한 주체는 지방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구와 일본의 사대관계보다는 유구와 청나라의 사대관계가 더 긴밀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의치 않았다. 서양의 침략으로 동아시아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유구 문제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한-러 군용기 영공침범 사건에 끼어든 것처럼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군용기 영공침범 사건에 끼어드는 오늘날의 일본 정부처럼, 1871년 당시의 일본 정부도 유사한 행동을 보였다. 메이지유신의 여세를 몰아, 이참에 유구를 확실한 우리 것으로 만들자는 욕망이 그 내에서 일어났다. 강상규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 '일본의 유구 병합과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은 이렇게 설명한다.
"메이지정부 내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유구의 중·일 양국에 대한 양속 상태를 해소하고 일본에 전적으로 귀속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 역사문화학회가 2007년 발행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0권 제1호.
유구인들이 타이완 주민들에게 살해된 사건을 명분으로 유구와 청나라의 관계를 끊고 유구를 자국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본 내에서 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구를 빼앗겠다는 목표 하에 일본은 일차적으로 유구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 조치에 착수했다. 유구를 보호한다는 명분 하에 유구를 일본 행정구역인 유구번으로 편입하는 동시에 유구 정부의 외교권과 인사권을 장악했다. 1871년 사건 뒤에 일본군을 유구에 주둔시켰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유구번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유구왕국이 곧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 유구왕이 유구번왕으로 개칭되고 일본의 내정간섭이 강화됐을 뿐이다. 일종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렇게 유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한 상태에서 일본은 청나라에 손해배상과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청나라가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타이완은 청나라 황제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지역'이라고 표명하자, 일본은 '일본 국민들(유구인들 지칭)'의 한을 풀어주고 타이완인들을 응징하다는 명분 하에 1874년 타이완에 군대를 파견했다(대만 출병). 유구인들에게 벌어진 재난을 명분으로 청나라 영토를 침범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청나라가 굴복하는 것으로 끝났다. 청나라는 배상금 50만 량을 지불하는 동시에, 유구 백성들이 일본 국민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유구는 일본 땅'이라는 일본 측 주장에 동조해준 것이다.
'국민 보호한다'며 끼어드는 일본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