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여름밤' 이서현 대표가 지난 1월 31일 명절 가부장제를 주제로 다룬 그림일기
서늘한 여름밤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 한다
'서늘한 여름밤' 그림일기를 애독하는 사람으로서, 가끔 인터넷에서 일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공격성 글을 쓸 때면 함께 화가 나곤 했다. 최근에는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일기를 비판하며 '그런 사람에겐 몽둥이가 약'이라는 식의 글도 본 적이 있었다. 대표는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 그림일기에 페미니스트의 삶도 보인다. 인터넷에서 일부 사람들이 대표님의 그림일기에 대해 모욕적인 글을 쓰기도 했던 거로 안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두 가지. 법적대응과 분노다. 한 번은 명절에 시댁 내려가지 않겠다는 에피소드를 그렸는데, 마이너한 언론사에서 그것에 대해 인신공격적인 글을 실은 적이 있었다. 인성이 덜 됐다면서 밑에 몽둥이가 그려진 이미지를 넣기도 했다. 이런 일을 겪으면 피로가 쌓인다. 두렵기도 하다.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쪼그라드는 일이다.
그래서 여성창작자 모임을 만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우리가 서로 지지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만든 지 1년 정도 됐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 나만 악성댓글에 상처받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잊어버려', '그런 애들한테 신경 쓰지 마'라는 말도 상처가 됐다. 셀프디펜스를 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공격을 받으면 더 상처받는다. 나랑 정말로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거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더라."
- 그런 저열한 공격에 다시 공격적으로 대응할 때면 존엄성이 훼손된다고 느끼지는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느냐에 따라 내 존엄이 훼손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머리끄덩이 잡고 싸운다고 해서 내가 덜 우아한 사람이 되는가? 싸워야겠다면 싸우는 거다."
-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회사원이든 프리랜서든 제 자리를 지키기가 힘이 든다. 왜 그럴까.
"상담심리가 여초 업계라, 여자라서 불편했던 적은 다른 업계에 비해 적다. 여자가 나이 들어서 일하기 힘든 이유라니.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답 아닌가(웃음). 40대에 투명인간이 된다고들 하는데, 가정으로 간 사람들을 사라졌다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만큼 가사를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돈을 버는 일만 진짜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노동시장에서 가정으로 가는 건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친구들만 봐도 첫째까지는 어찌어찌 버텨보지만, 둘째까지 낳으면 집을 벗어나는 게 힘들다. 엄마가 되면 노동시장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그런 것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40대 이상의 여성들이 갈 만한 좋은 자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버텨도 부사장은 되지만 사장은 될 수 없지 않은가. 상담 같은 여초 집단 내에서는 성별에 따른 차별은 없는데 직급 차이는 크다. 장급은 남자가 하고 실무자급은 여자가 많다. 승진해야 하는데 40대 이상부터는 경력이 쌓여도 처우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좀 그렇지 않아?'라는 말 한마디로 정리되어 버린다. 40대, 50대 여자 책임자는 드문 존재다. 그런 이례적인 일을 받아들이려면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례적인 일을 받아들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하며 살 수밖에 없다"
- 앞서 섹스칼럼니스트 은하선 대표를 인터뷰했다. 여성연대의 부작용에 대해 우려했다. 어떻게 보나.
"여성연대는 물론 필요하다. 다만 방식이 다를 수 있는 것 같다. 일단, 왕 목을 베고 내가 왕이 되겠다는 방식이 있다. 남성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여성이 가지자는 거다. 그런데 내가 꿈꾸는 건 왕의 목을 베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자는 거다."
[은하선 대표 인터뷰 ①] '섹스 얼마나 해봤냐'는 질문, 왜 들어야 하죠?
[은하선 대표 인터뷰 ②] "가부장제는 남자들만이 만든 게 아니다"
- 누군가 왕이 되지 않고?
"그렇다. 야망 있게 보이려면 사회에서 짜 놓은 야망이라는 틀을 밟아 나가야 한다. 그건 기존에 이 사회를 지배해온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구조적 문제를 그대로 탑승하게 되는 것과 다름없다. 누군가의 야망을 밟는다는 건 곧 누군가를 착취하고 누군가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만 해도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지 않나.
나도 혁명을 일으키고 싶다. 사람들이 좀 더 일하기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야망이 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야망처럼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공동체 만들겠다는 거야?' '그게 무슨 야망이야?'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기존의 체제 안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보다,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 다음 세대의 노동은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하나.
"노동시장이 지금보다 유연해질 것 같다. 직장이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기의 생존을 회사에 의탁하지 않게 됐으면 좋겠다. 개인적인 능력을 개발하고, 회사와 근로자가 동등하게 존중받았으면 한다. 그런데 살아서는 그런 모습을 못 볼 것 같고, 아마 지금의 일본처럼 부족한 노동은 이민자들로 대체되고, 자국민들은 불만에 가득 차서 갈등이 심해지지 않을까."
- 심리상담을 직업으로 준비하는 젊은 여성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오지 말라(웃음). 블루오션이라고 하는데 망망대해인 셈이다. 부모님이 돈 좀 있냐고 누군가 물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심리상담은 돈을 벌려면 서른이 넘어야 한다. 그때까지 누군가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줘야 한다. 이 돈 받으려고 이 고생을 했나 싶을 수도 있다."
- 심리상담은 전망이 좋다던데.
"그 말은 사람들이 50년 전부터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상담 일이 좋다면 와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사는 수밖에는 없다. 다 자기 계급 안에서 최대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게 아니겠나."
-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해줄 말이 있을까.
"자기 '곤조(근성이라는 뜻의 일본어)'대로 사세요. 2030 여자들이 어떤 결정을 하면, '넌 어려서 잘 몰라서 그래' 아니면 '네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아서 그러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이 주관적으로 지각하는 세계를 믿고 나아갔으면 좋겠다.
변화가 너무 빠른 세상이다. 어제의 답이 오늘의 답이 되지는 못하는 걸까? 선배들이 걸어갔다던 길은 따라서 걸으려고 보면 없어진 지 오래다. 조금씩 자신의 길을 만들어나가는 이들을 동료로 두고, 이 시대에 맞는 방법을 같이 모색해나가는 수밖에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