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의 풍경을 담아 유명해진 김미경 화가
김미경 화가
문득 올라간 옥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황홀했다. 바쁘게 일하면서 앞만 보고 지나쳤던 때에는 볼 수 없던 풍경이 거기 있었다. 그곳의 정경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 외침에 따라 펜을 잡은 것이 소박한 시작이었다. 그리는 나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막연하기만 했던 '화가'라는 꿈도 선명해졌다. 안정된 삶의 권역을 벗어나, 월급으로는 살 수 없는 행복을 만끽하며 그림 그리는 업(業)에 푹 빠져 있는 김미경 화가를 지난 5월 만났다.
<한겨레> 창간 당시 여성 담당 기자로 입사한 그녀는 사내 미술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그림을 시작했다. 치열한 취재와 살벌한 마감의 외줄타기 속에서 녹초가 되기 일쑤였지만, 꾸준히 그림을 그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글과는 다른 결을 가진 그림의 세계에 서서히 빠져들어 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화가는 지극히 멀리 있는 꿈이었다. 걷던 방향으로의 항해가 이어졌다. 이후 <인터넷 한겨레> 뉴스부장을 거쳐 여성주의 월간지 <허스토리(Herstory)> 편집장을 맡으면서 주목받았지만, 부진한 판매로 인해 폐간에 이르면서 회사를 떠나게 된다.
54살에 찾은 길
첫 번째 퇴사 후 그녀는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딸이 유학 중이던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문화원'의 리셉셔니스트(접수 담당자)로 일했다. 원하던 일이 아니기에 느꼈던 상대적 박탈감은 미술관과 갤러리를 다니면서 접한 그림들이 채워주었다. 또한 7년간의 뉴욕 생활은 한국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저희 아버지도 그림을 잘 그리셨고, 어머니도 탁월한 미적 감각을 갖고 있는 분이었어요. 딸이 다섯인데 언니 둘이 미대를 나왔고요. 미대 다니던 큰 언니랑 방을 같이 쓰다 보니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그림도 많이 보고 그랬거든요. 그땐 서양 작품들이 마냥 멋있게 보였죠.
그런데 어느 날 메트로폴리탄뮤지엄 한국관에 있는 자개함을 보는데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자개농을 촌스럽게 생각했던 저를 반성할 정도였죠. 우리의 미의식 자체도 어찌 보면 굉장히 서구화되어 있잖아요. 뉴욕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그곳의 인공적인 아름다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한국의 자연미를 비로소 느낄 수 있겠더라고요."
2012년 시민단체 '아름다운 재단'의 사무총장을 맡으면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의 일들이 뜨거운 열정을 불사를 만큼의 재미는 주지 못했다. 평범한 일상을 흘려보내던 그녀에게 무언가 포착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런 그녀를 사로잡은 것은 사무실 옥상에서 바라본 풍경이었다.
"인위적인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거기 있었어요. 인왕산 아래 자리 잡은 기와집과 적산가옥을 스마트 폰으로 그리기 시작했죠. 그 그림에 '서촌옥상도 0번' 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이때부터 직장생활과 그림 그리는 생활을 병행했지만,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다. 온전히 그림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2014년에는 급기야 사표를 던지게 된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 선배에게 돈까지 빌린 그녀는 54살의 나이에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건성으로 좋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내 마음과 몸이 온전히 좋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불편을 감수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결정할 때는 힘들었지만, 또 어떻게든 살아지더라고요.
사실은 정말 어려웠죠.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27년 동안 내 월급으로 살아왔는데, 그걸 포기한다는 게 공포 그 자체였어요. 나답게 사는 삶이라는 선택지를 골랐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걸 처음에는 잘 몰랐던 거죠. 그렇게 호된 대가를 치르고 나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또 다시 그런 결정들을 내리게 되니까 이제는 습관이 된 거예요. 물론 경제적으로는 전보다 어려워졌지만, 삶은 훨씬 자유로워졌어요."
하루에 10시간씩 집중해 그림을 그리던 그녀는 친구들의 권유로 페이스북을 통해 옥상에서 그림 그리는 일상을 올리면서 '서촌 옥상화가'로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