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Signal, 2019) 황예지 작가의 언니가 유리알을 들고 있는 모습.
황예지
대상이 가족에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여성으로 넓어졌단다. 각자의 여성으로 살아온 시간들. 작가는 여기에 '숭고'라는 포인트를 주고 싶었단다. 그는 '여성다움'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정의내린다.
"여성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하나요? 처연해야 하나요? 그것은 여성을 '있는 그대로'로 보지 않고 사회가 준 감정을 가미한 것이죠. 강인한 여성을 보여주고 싶어요. 제 사진은 약간 어그러져 있어요. 가령, 살이 튼 것들. 이것은 '미'와 '추'의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숭고하게 다루고 싶었거든요."
<마고>는 '사랑'을 주제로 각 공간별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공간은 키워드에 맞춰 작가의 작업을 저장했다. 다른 곳에선 가족과 성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나머지는 동료들에게 유형학/주제론, 과거의 이미지 생산법을 제시하여 사랑을 구현했다.
이는 사랑의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사진계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행위를 무효화하고 젊은 사진의 역량을 호소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전시의 메인 공간은 작가가 겪고 동침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자신을 떠났던 엄마와 엄마 역할을 대신했던 친언니를 시작으로 학창시절을 지나 양성애자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사진으로 풀어냈다. '자궁, 히스테리아'라는 단어를 통해 그동안의 사랑을 미화하지 않고 픽션으로 조립했다.
전시의 대상을 '자궁을 가진 사람들'로 정해졌다. 역시 사랑에 대한 다층적 해석과 연관돼 보인다. 왜 그들일까.
"엄마도 언니도 친구들도 저마다의 히스토리가 있어요. 여자로서의 역사가 다르거든요. 역사를 모아서 또 다른 하나의 큰 역사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그는 옛것과 새것이 충돌한다고 믿는다. 이는 수고롭게 채집하면서 동시에 떠나보내는 일이다. 누구는 명징한 것 같으면서도 명징하지 않다고.
"한국 사회는 획일적인 방식으로 개인의 삶에 사랑을 포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혹은 사랑하지 않음에 대한 죄책감을 자신의 시각에 대입하죠. 획일화된 사랑에 사소한 대항을 하고, 물음표로 끝나는 팻말을 관객에게 넘길 거예요. 사랑에 대한 탈피와 고찰을 작게는 개인이, 크게는 사회가 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공개했다.
"하나의 신화가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 태어난 순간부터 여자라는 이름의 연대기가 시작되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고 여자의 생을 빌렸고 여자를 사랑했다. 여자의, 여자라서, 여자인. 그 이름이 내게 드넓다. 숭고한 표정을 짓는다. 쓰러진 등줄기는 능선이 되었고 갈라진 피부는 개천이 됐다. 서로의 팔목을 잡고 원을 그린다.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우리야. 비릿한 만큼 창조야."
소셜 네트워크의 등장으로 이미지를 생산하며 재현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지금은 대중이 이미지를 수집하기 쉬운 환경이 됐다. 게다가 사진은 손대기 쉬운 매체로 변했다. 반면 전시장 안의 사진은 속도감에서 조금씩 뒤처진다.
"현재의 한국 사진 생태계는 기형적이고 불안정해요. 전시장에 걸리는 사진은 유형과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젊은 사진 사이에서는 '스냅'을 파괴하는 사진의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대중만의 사진을 읽는 눈이라며, 이것을 가독성이라 말한다. 젊은 이미지를 전통의 잣대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읽으려는 노력과 인정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현재의 '이미지 생태계'와 '사랑의 혼동'이 매우 흡사하다 한다.
'사진이 예술이다 혹은 아니다'는 논쟁이 외국보다 한 차례 늦게 시작된 것처럼 현재 한국에서는 '스냅 사진이 예술이다 혹은 아니다.'는 쟁점이 불고 있다. 그것은 '스냅사진'을 가벼운 존재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담화는 최근 몇 년간 암묵적으로 지속되었단다. 이런 분위기에서 젊은 사진가들은 전시장이 아니라 스크린 혹은 재생을 택하는 경우로 증가하고 있다. 이처럼 가독성이 증가하고 있는 현대에 사진 예술의 속도가 불어나는 것과 다채로워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