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담합을 통한 3당합당을 반대하는 순간의 노무현.지난 92년 대선을 앞두고 이루어진 김영삼과 노태우, 김종필의 담합을 통한 3당합당을 반대하는 순간의 노무현.
김종구
그가 옥살이하는 동안 정국은 많이 변했다. 여소야대로 출발했던 노태우 정권은 1990년 1월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3당 야합으로 거대 여당 민자당이 태어나고, 이를 배경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어 여러 명의 학생ㆍ노동자가 분신하는 등 정국은 5공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노회찬은 이 같은 사실을 옥중에서 듣고 6월항쟁의 성과가 묻히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그가 출소하기 며칠 전(3월 24일)에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김영삼의 민자당은 총선 전 218석에서 69석을 잃은 116석, 김대중의 민주당은 97석을 얻었다. 민주당이 서울 등 대도시에서 크게 진출하여 민자당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는 표심을 보여 주었다. 혁신정당 민중당은 51개 선거구에 후보를 내 출마지역 평균 6%의 득표율을 거두었으나 한 석도 당선자는 없었다. 참패였다.
이에 앞서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분적으로 부활하여, 3월에는 시ㆍ군ㆍ구ㆍ기초의회 의원선거, 6월에는 서울특별시 등 시ㆍ도 광역의회 의원선거가 각각 실시되었다.
단체장은 여전히 묶어두고 자치단체 의회 의원선거만 실시한 반쪽 지방자치선거였다. 선거는 진보진영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노회찬은 감옥에서 진보ㆍ혁신세력의 장래와 관련, 여러 가지 구상을 하였다. 한국 정치를 바꾸고 효과적으로 노동계급의 권익을 향상시키는 데는 합법정당 운동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노동운동에서 정당운동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평소 즐겨 읽었던 이탈리아의 곱사등이 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빨이 빠지고 위장이 망가지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쓴 『옥중수고』의 정신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역사의 경작자가 되고싶어 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싶어했다. 아무도 역사의 '거름'이 되고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먼저 땅에 거름을 주지 않고 경작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경작자와 거름은 둘 다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추상적으로는 모두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거름은 희미한 그림자로 사라버리곤 했다."
노회찬은 혁신정당의 '거름'이 되고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