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제주도 여행이란, 슬슬 돌아다니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올레길을 걷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어딜 가나 사진을 찍는 것이 메인 이벤트였다.
신소영
2주 전, 마흔 중반 넘어서 만난 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밤늦게 올라오는 꽉 찬 2박 3일 일정이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만난 친구의 여행용 캐리어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고박 사흘 국내 여행인데 캐리어는 8박 10일 유럽 여행 수준이었다. 평소 멋쟁이였기 때문에 옷을 많이 갖고 왔다 쳐도 크기가 과하다 싶었다. 궁금증은 호텔에 도착해 짐을 정리하며 풀렸다.
"소영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가 코디해 왔어요. 한번 입어 봐요."
친구는 나를 위해 여러 벌의 옷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거기서 첫 번째로 놀랐고, 그녀가 준비해왔다는 옷을 보는 순간 두 번째로 놀랐다. 세상에. 그녀가 나를 위해 가져온 옷 중에는 주황색 블라우스와 샛노란 롱스커트, 함께 곁들일 벨트가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원초적 원색 배합이었다. 게다가 허리 벨트라니. 굵은 허릿살은 감추기 바쁜 '적폐'였거늘 그걸 벨트를 매서 드러내란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안 해본 짓을 하고 싶어졌다. 여긴 여행지 아닌가. 못 이기는 척 순순히 말을 들었다. 어머나, 생각했던 것보다 잘 맞았다. 굵은 허리 라인도 겁 먹었던 것에 비하면 꼴사납지 않았다. 옷을 그렇게 입으니 어쩐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본격적 일탈은 그다음부터 시작됐다. 옷을 갈아입고 여행을 시작하면서 내가 그렸던 제주도 여행의 모든 밑그림이 깨졌다. 그동안 제주도 여행이란, 슬슬 돌아다니거나 맛있는 걸 먹거나 올레길을 걷는 게 전부였는데, 이번에는 어딜 가나 사진을 찍는 것이 메인 이벤트였다.
사실 난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보면 멀뚱히 서 있는 게 포즈의 전부다. 아주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하면 손으로 브이나 하트를 그리는 정도. 사진기 앞에 서면 늘 어색했고, 나이 든 모습이 보기 싫어서 풍경만 찍은 지 오래된 터였다.
친구는 달랐다. 모델 저리 가라 하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나에게도 어찌나 많은 포즈를 가르치며 요구하는지, 그 열정에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처음에는 얼굴에 경련이 일고, 눈동자는 갈 곳을 잃고, 팔다리는 고장 난 로봇처럼 허우적거렸다. 순전히 친구의 취향과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시작한 촬영인데, 하다 보니 재밌었다.
숙소에 들어와 그날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었다. 대개는 나의 바보스러운 포즈 때문이었다. 마치 말똥만 굴러가도 웃던 소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각도의 예술 덕에 실물보다 예쁘게 나와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진 속 나를 보고 놀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내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편안하면서도 천진한 얼굴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저런 얼굴을 꽁꽁 숨기고 살아왔다는 게 어쩐지 미안해질 정도로.
악행이라도 저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