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 포스터문익환 목사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자기보다 매사 한발 앞서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고 한다. 윤동주가 자신의 말처럼 대기만성형이라면 송몽규는 천재형이 아니었을까.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아름다운 두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는 2016년 2월 17일 이준익 감독에 의해 영화 <동주>라는 이름으로 제작, 개봉된다. 영화 <동주>는 117만 명이 관람했다.
㈜루스 이 소니도스
일본 유학 첫 해 쓴 작품이면서 동주가 남긴 마지막 시가 '쉽게 씌어진 시'다. 영화 <동주>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 만나는 여학생 쿠미(최희서 분)가 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밝힌 것처럼 쿠미는 가상 인물이다. 도쿄 유학 시절 윤동주는 결혼 상대로 친구 여동생 박춘혜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이어지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윤동주는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옮긴다. 1875년 설립된 도시샤는 일본 사립대학 중 여덟 번째로 문을 연 곳으로 윤동주가 다니던 릿쿄대학보다 오래된 학교다. 도시샤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이기도 하다. 윤영춘의 회고에 따르면 교토 시절 윤동주는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새벽 2시까지 읽고 쓰고 구상하고,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북간도로 귀향하려 했던 윤동주는 7월 14일 일본 특수경찰인 특고(特高) 형사에게 체포된다. 절친이자 교토에서 함께 유학하던 송몽규와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활동을 했다는 혐의였다. 윤동주의 체포와 투옥에 대해 그의 가족은 '독립운동' 혐의였음을 주장했으나 국내 문학계는 일제의 과잉 단속에 희생양이 된 걸로 받아들여 왔다.
윤동주와 송몽규가 실제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됐음을 일본 정부 서류를 발굴해서 입증한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도시샤대학 출신이자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인 우지고 츠요시(宇治鄕毅)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부관장을 지내고 <근대 한국 도서관사의 연구>(近代韓国図書館史の研究, 1988)를 쓰기도 한 우지고 츠요시는 일본 정부의 극비문서 중 특별고등경찰의 <특고월보>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재 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 책동 개요' 문서를 찾아냈고, 또 다른 극비문서인 <사상월보>에서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을 찾아 공개했다(<사상월보>에서 윤동주 판결문을 찾아 공개한 사람은 또다른 일본인 이부키 고다).
우지고 츠요시가 일본 정부 비밀문서를 발굴해서 공개한 사연에도 인연이 있다고 한다. 정병욱의 남동생이자 국립중앙도서관 사서였던 정병완은 1970년 10월 15일부터 1주일 동안 윤동주 서거 25주년, 국립중앙도서관 개관 25주년 기념으로 '시인 윤동주 유고전'을 열었다.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던 우지고가 이 전시회를 자세히 살펴보고 정병완을 통해 윤동주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없다는 사연을 들었다고 한다(관련기사 :
"영화 <동주>가 빼먹은 특별한 '엔딩 크레디트'").
일본으로 돌아간 우지고는 기밀문서 해제 시점에 해당 문서를 발굴해서 한국에 전했고, 그의 노력으로 1977년 <문학사상> 12월호에 일본 특고경찰의 비밀기록이 공개됐다. 윤동주와 송몽규의 독립운동 기록의 발굴·공개는 한일 두 나라 도서관 사서의 기묘한 인연과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 신분으로 자국의 어두운 과거사를 공개하는 데 앞장 선 우지고 츠요시의 행동은 지성인인 사서로서의 귀감이 아닐까. 일본인으로서 그가 겪었을 고심에도 불구하고 학자와 사서로서 그가 양심에 따라 한 행동 덕분에 우리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마지막, 그리고 최후의 진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우지고는 윤동주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해서 <시인 윤동주로의 여행>(詩人尹東柱への旅)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44년 3월 31일 윤동주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규슈 후쿠오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윤동주는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둔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지 19개월, 8.15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1945년 3월 7일에는 절친이자 후쿠오카 감옥에 함께 투옥된 송몽규도 옥사한다.
윤동주 유해는 아버지에 의해 후쿠오카에서 화장돼 1945년 3월 6일 북간도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동주의 장례식 때 그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됐다. 장례 후 그의 유골은 용정 동산 중앙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집을 내지 못했지만 시인으로 살다 간 그의 무덤엔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기적처럼 전해진 윤동주의 육필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