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단란한 가정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운동기구와 식탁, 그리고 부엌의 그릇들이 이재민의 아픔을 대신 말하고 있다.
정덕수
곳곳에 흉터를 만들어 놓은 풍경
이 집 주인은 젊어 보였다. 마흔이나 됐을까 싶은 모습이었다. 그릇으로 미뤄 대가족이 한집에 살았던 듯하다. 찜기와 냉면이나 여름철 콩국수를 담았음직한 도자기 냉면 대접이 두 죽(그릇 따위의 열 벌을 묶어 세는 단위) 정도 되는데, 그중 12개의 냉면 대접은 포개어진 상태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다.
시골 가정집에선 볼 수 없는 금고가 있는 방. 가족들이 건강을 위해 운동을 했었나 보다. 부모님을 위해 준비한 듯한 안마의자가 갖춰진 방도 화마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불에 탄 금고 옆엔 누군가 금고를 확인하려 했는지 마시다만 물병이 놓여있는데 그것만 다른 색깔이라 낯설다.
TV도, 컴퓨터도 모두 불타고 철판만 흉물스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유리를 녹일 정도의 열기가 휩쓴 상태에서 가족이 안전한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탈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태워졌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주인은 막막할 뿐이겠다.
몇 장 더 사진을 촬영하는데 친구가 전화로 어디냐고 물었다. 속초고등학교 근처라고 일러주고 친구가 기다리는 학교 앞으로 갔다. 차에 오르자 "참 신기하지. 중간에 있는 집은 멀쩡한데 그 주변에 있는 집들은 다 타고 말이야"라 했다. 조금 전 내가 들렀던 집도 바로 앞도 그랬다.
강풍에 불이 어지럽게 날리며 곳곳에 흉터를 만들어 놓은 풍경이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흉터를 찾는 일보다 성한 산과 집을 찾기가 더 어려운 풍경, 친구와 돌아보고 싶은 장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도 마음은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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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보고, 많이 듣고, 더 많이 느끼고, 그보다 더 많이 생각한 다음 이제 행동하라.
시인은 진실을 말하고 실천할 때 명예로운 것이다.
진실이 아닌 꾸며진 말과 진실로 향한 행동이 아니라면 시인이란 이름은 부끄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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