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배기 장승'정조 전설'에 등장하는 장승배기 장승은 1991년 이 자리에 복원되어 여러 차례의 수난을 이겨내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곳에서 매년 개최하는 <장승제>는 서울시의 서울미래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김학규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장승배기는?
상도동과 노량진동의 경계를 가르는 이곳 장승배기도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다.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숭실대생들이 이곳 장승배기를 거쳐 한강인도교를 넘어 시내로 진출했다. 1965년에는 한일회담반대투쟁에 나선 성남고 학생 1200여 명이 이곳 장승배기 방면에서 노량진 3거리를 향해 행진을 시작하기도 했다.(
<대체 노량진삼거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참조)
장승배기는 1973년 중앙대생 500여 명이 학교 후문을 통해 진출하여 반유신투쟁을 벌인 곳이자, 1978년에는 서울대생 600여 명이 반유신투쟁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김대중과 더불어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였던 상도동계의 김영삼 집이 인근에 있었던 점도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1980년 5월 민주화의 봄 당시에는 숭실대, 서울대생들이 5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이곳 장승배기를 거쳐 한 번은 영등포 방면으로, 다른 한 번은 한강인도교 방면으로 행진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 이래 한동안 집회 명소로 사용되었던 보라매공원의 집회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되면 서울역 방면 진출을 시도하는 시위대의 행진은 반드시 이곳 장승배기를 거쳐야 했다.
한편, 1974년 유신시절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유인태도 이곳을 찾았다 가까스로 체포를 면한다. 장승배기 사거리 파출소 앞에서 불심검문을 당하지만 태연하게 먼저 다가가서 경찰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아까 이미 검문을 받았다"고 받아치는 대담함을 발휘해서 위기를 극복했던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서 있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승배기 장승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조 전설'로 널리 알려진 장승배기 장승
이곳은 원래 장승배기 장승으로 더 유명하다. '정조 전설'에 따르면 화성에 있는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행차 하던 정조가 잠시 쉬어가던 곳이 지금의 장승배기였다.
정조 시대에 장승배기는 인가도 드물고 아름드리 나무숲이 우거진 곳이라,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이에 정조는 숲이 울창하고 인가도 드물어 으슥한 그곳에 장승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러면서 하나는 남자의 형상을 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다른 하나는 여자의 형상을 한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이름 붙이도록 명했다는 것이다.
장승배기 장승은 왕명에 의해 만들어져서인지 다른 장승들하고는 급이 달라 전국의 장승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대방장승'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방동이라는 지명이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세워진 장소부터 대방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대방동의 옛 이름은 번대방리였는데, 번대방리는 지금의 대방초등학교 자리에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을 둘러싸고 마을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런데 전설과 달리 영조 재임 시절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에 장생현로(長栍峴路)가 이미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 이전부터 장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장승배기 장승과 관련한 정조 전설이 역사적 사실이기보다는 후대에 만들어진 설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변강쇠와 옹녀, 그리고 장승배기 장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