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 건대항쟁 기림상10.28 건대항쟁은 한국 학생운동사 뿐 아니라 세계 학생운동사에서도 드문 사건이다. 10.28 건대항쟁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1991년 10월 28일 만든 기림상. 10.28 건대항쟁 당시 가장 많은 학생이 농성했던 사회과학관(현 경영관) 앞에 세워졌다. 김봉준이 조각했고, 기림상 앞 바닥에는 서울시 인권현장 바닥동판이 새겨져 있다.
백창민
한편 전두환 정권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직선제를 지지하는 민심이 크게 일자 반대 세력을 뿌리 뽑고 정권을 연장하려 한다. 박철언이 증언한 것처럼 전두환은 국회 해산과 비상계엄령을 포함한 '친위 쿠데타'를 구상한다. 1986년 5.3 인천사태 때부터 공안정국으로 전환한 전두환 정권은 건국대 집회를 학생운동 일망타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일본 학생운동의 전환점이 된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건처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당국은 대학생 집회를 사전에 봉쇄했는데, 행사 당일 건국대에는 전투경찰을 대규모로 배치했을 뿐 검문검색을 하지 않았다.
10월 28일 오후 애학투련 결성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강제 몰이를 시작한다. 진압을 피해 학생들은 건국대학교 중앙도서관(현 언어교육원), 대학본관(현 행정관), 사회과학관(현 경영관), 학생회관, 교양학관(현 법학관) 5개 건물로 흩어졌다. 건국대의 경찰 철수 요청과 시위 학생 측의 자진 해산 요구를 경찰은 거부한다. 경찰의 '계획된' 진압으로 '계획에 없던' 3박 4일간의 점거 농성이 시작되었다. 농성 학생의 30%인 465명은 여학생이었다.
여러 건물에 시위대를 강제 몰이한 경찰은 전기와 물을 끊고, 언론을 통해 '공산혁명분자의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며 시위 학생을 용공세력으로 몰아갔다. 첫눈까지 내린 때 이른 추위 속에 '사흘 밤 나흘 낮'에 걸쳐 점거 농성은 이어지지만, 10월 31일 아침 경찰은 강제 진압을 시작한다.
학생 시위 진압 과정에 최초로 헬기를 동원하고, 소방차 30대, 연인원 1만8900명의 전투경찰을 진압에 투입한다('황소 30'이라는 작전명으로 건대 시위 진압을 지휘한 경찰 책임자는, 박종철 군 사망 발표 때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말을 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학생 53명이 부상과 화상을 입고 모든 시위 학생이 연행된다. 학생 농성과 경찰 진압 과정에서 건국대는 23억5천만 원의 손실을 입었다.
경찰은 연행 학생 1525명 중 무려 1288명을 용공분자로 몰아 구속한다. 한국 학생운동사상 최대 공안사건이며 해방 이후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구속자를 낸 사건이다. 최다 인원 농성, 최악의 진압 방식, 최대 구속자를 낸 건대항쟁은 세계 학생운동사에서도 드문 사건이다. 사건 직후 정부와 언론은 '공산분자들이 뿌리 뽑혀 더 이상 캠퍼스에서의 소요는 없을 것'이라며 학생운동의 종말과 학원의 안정을 단언했다.
지성의 전당이자 대학의 심장이 초토화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