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의 임시정부 이재과장 임명장(1943)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서 활동한다.
국사편찬위원회
당사자인 박영준과 신순호도 결혼하기 전부터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8)와 한국광복군(1940)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지였다. 1938년 10월 임시정부 요인과 한인 동포들을 태우고 광저우성 포산(佛山)에서 산수이(三水)로 피난 가던 기차가 일본군 비행기의 기관총 공격을 받았을 때도 부상당한 박영준을 옆에서 지킨 이가 바로 신순호였다.
박영준은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나와 한국광복군 제3지대 1구대장과 임시정부 이재과장을 역임하였고, 신순호는 한국광복군에서 선전활동을 맡았고 임시정부 외무부 정보과에서 근무하면서는 중국 중앙방송국의 한인 상대 한국어 방송 관련 업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박영준과 신순호는 1943년에 충칭 임정청사 대례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박영준의 회고에 따르면 "이 당시 중경의 한인 사회는 400명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동지 간에 결혼을 한다는 것은 다소 드문 일이기도 했다. 결혼식장인 임시정부 강당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가족들과 중경에 있는 한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대한민국 이십오년 십이월 십이일'에 결혼했음을 증명하는 붉은 비단에 파란 글씨의 결혼증서가 전한다. 결혼증서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내로라하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보인다. 백범 김구는 주례로, 조소앙은 증혼으로, 민필호와 엄항섭은 소개로 등장하고 있다.
조완구(한국독립당), 김원봉(조선민족혁명당), 김성숙(조선민족전선연맹) 등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각 당 대표들의 축사도 있었다. 조완구가 "비록 성은 다르지만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축사를 했다는데, 이는 참석한 모든 이들의 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박영준·신순호 부부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주화대표단 단장을 맡은 박찬익과 함께 만주에서 활동하다 1948년에야 귀국하는데, 박영준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많던 국군에 참여하여 소장으로 제대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지키는 역할도 수행했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독립운동 관련 유물 2129점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결혼증서를 비롯하여 박찬익·신건식의 독립운동 관련 유물 2129점은 박영준‧신순호의 딸 박천민이 2014년 경기도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알려진다.
궤짝 두 개에 담겨 있던 이 유물은 6·25한국전쟁의 참화에도 살아남았는데, 1970년에 일어난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상도동 자택 화재로 하마터면 불타 없어질 뻔했다.
당시 박영준‧신순호 부부의 집은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고 하는데, 화재는 당시 한전 사장으로 근무하던 남편 박영준이 없는 상황에서 2층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때 신순호는 1층에 있던 두 개의 궤짝을 밖으로 옮기는 일을 제일 먼저 했다고 한다.
딸 박천민은 "궤짝만 지키고 있으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느라 중학교 졸업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교복과 책이 다 불타는 것을 어쩌지 못했고, 결국 졸업식에는 사복을 입고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00살의 활동가 임우철
해방 이후 상도동에서 생활한 독립운동가로는 박영준‧신순호 부부 말고도 김성호, 김중화, 김지환, 남정각(남영득), 서병철, 신공제, 이경도, 이대산, 이성구, 이수현, 이인곤, 김명수, 임우철, 채수반 등이 더 있다.
이중 독립유공자 임우철(1920~ )은 10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모습으로 최근 2·8독립선언 100주년 서울 기념식(서울YMCA 대강당)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데, 지하철 7호선 상도역 인근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