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무위당 장일순 선생
무위당 사람들
박정희 정권 시대 건전한 노동운동은 용공 좌익으로 몰리기 십상이고, 이에 따라 광산촌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어용노동조합이었다. 회사와 유착관계여서 광부들의 권익향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경국은 이같은 여건에서도 장성ㆍ태백ㆍ도계 지역의 탄광촌을 다니면서 조합원들의 의식을 바꿔놓았다.
광부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뽑고 노동금고 등 폐쇄적인 조합을 신용협동조합으로 전환시키는 노력을 하였다. 장일순은 때로 광산촌을 찾아 광부들에게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일깨웠다.
"협동조합은 민주주의를 배우는 훈련장"이라고 말하면서 고리채에 고통 받는 가난한 광부와 농민들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푼돈을 저축한 돈을 자금으로 하여 신용협동조합을 만들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은행보다 더 싸고 쉽게 빌려 쓰도록 하였다.
농민(광부)들이 교육을 통해 신협의 원리를 알게 되니까 마을에 작목반 회비나 대동계 이런 돈을 모으고 조합원들이 출자해서 신협을 만들자고 한 거예요. 그렇게 마을마다 신협을 만들었어요.
협동교육연구소에서 임원교육, 실무자 교육 등 초청교육을 했어요. 그러면서 부락민들의 의식을 깨우친 거죠. 장일순 선생님이 "협동조합은 민주주의교육훈련하는 과정이다"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사람들의 의식이 계발되는 거죠.
전처럼 이장이 동네 주민들 도장을 갖고 있던 것들이 바뀌어 갔고요. 면사무소에서 보기를 주민들이 전에는 말을 잘 들었는데 이후에는 자꾸만 묻고 따지기 시작한다면서 불편해하더라고요. (정인재 전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광부들은 교육을 통해서 자기들이 사 먹고 사 입는 것, 생필품들이 여러 유통조직을 통해 마을까지 도착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유통구조를 줄이는 방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소비조합의 원리에 의해서 마을주민들이 조합에 가입해 공동구매사업을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다섯 단계를 거쳐서 마을까지 왔다면 세 단계로 줄이는 방법을 찾은 거죠. 그래서 소비자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신협을 만든 경험이 있으니까 그 경험을 토대로 소비조합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소비조합을 하면서 물건값을 줄였는데 나중에는 소비조합연합으로 발전했어요. 광산소비조합협의회와 농촌소비조합협의회 등으로 말이죠. (이경국 전 무위당 만인회장)
신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1977년에 협동조합운동은 3개도 13개 시ㆍ군, 90여 개 농촌부락과 10여 개 탄광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때에도 무위당 선생이 중점을 둔 것은 교육활동이었다.
재해대책 상담원들은 한 달에 한번씩 원주 개운동에 있는 원주교구교육원에 모여 협동조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신협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75년부터는 신협임원교육과 실무자 회계교육, 조합원 및 광산부녀자 교육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무위당 선생은 협동을 주제로 한 교육을 할 때마다 "우리가 연대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면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면서, 화합과 협동의 논리라는 시각으로 봐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석 2)
주석
1>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일순의 사회개혁운동>, 김영주 무위당 만인회고문, 대담 : 김찬수.
2>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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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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