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리도 텐리대본강리도 텐리대본 부분도
<대지의 초상>
매우 축소된 이미지라서 식별하기 힘들지만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에 몇 개의 지명을 적어 놓았습니다(붉은 화살표). 거기에 法里桑('파리상')이 적혀 있는데 팔레르모로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만일 '桑' 이 '莫'의 오기라면 '파리모'가 되어 발음이 더욱 근접하게 됩니다(스기야마).
하지만 '파리상'으로도 개연성이 다분합니다. 桑은 발음과 관계 없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 지도에서 알 수 없는 먼 곳의 지명에 나오는 글자이기도 합니다(이를테면 '扶桑'). 시칠리아 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팔레르모인 점을 고려하면 이걸 빼 놓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세계지도의 요람 중의 하나로서 팔레르모는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다음은 1184년 이곳을 방문한 이븐 주바이르의 목격담입니다.
"이곳은 여기 섬들의 대도시이다. 재화로 가득차고 광채로 빛난다. 고색창연하고도 우아한 도시이다. 웅장하고 품격이 있으며 매혹적이다. 탁 트인 공간과 전원 지역 사이에 당당히 서 있는 이 도시에는 대로와 소로가 많이 나 있다. 도시의 완벽함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이 도시의 기독교 여성들은 무슬림 여성의 패션을 따라하고 유창하게 아랍어를 하며 외투를 몸에 두르고 너울을 쓰고 있다."
조선에 나타난 무슬림들
이븐 주바이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기독교 노르만 왕의 치세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보았던 것은 진정한 다문화 왕국의 모습이었습니다. 세계지도의 산실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강리도를 탄생시켰던 고려말 조선 초의 문화적 풍토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세종 실록에 이런 대화가 보입니다.
조회를 받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설순(偰循)에게 묻기를, "너의 선조가 중국에 있을 때에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느 때에 벼슬하였느냐."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신의 선조는 서번(西蕃) 회골(回骨) 땅에 살았사오며, 원(元)나라 태조(太祖) 때에 비로소 벼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의 숙부(叔父)는 나이 몇 살 때에 여기에 왔으며, 우리 나라의 언어를 알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숙부 장수(長壽)는 나이 19세에, 미수(眉壽)는 나이 17세에 여기에 왔사오며, 언어는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석가모니가 천축(天竺)에 살았다는데, 어느 곳에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천축도 역시 서방에 있습니다." 하였다. -1425년(세종 7년) 1월 16일-
여기에서 서번(西蕃) 회골(回骨) 땅이란 현재 중국의 신장지역을 가리킵니다. 세종의 측신이었던 설순 가족은 그곳의 위구르 족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친 설경수 형제들은 여말 선초에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고 높은 벼슬을 하고 외교업무를 수행했습니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조선초기까지는 이슬람 복장을 하고 코란경을 읊으며 살아가는 무슬림 집단이 우리 땅에서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조에서 건의하기를 "회회교도(回回敎徒)는 의관(衣冠)이 보통과 달라서, 사람들이 우리 백성이 아니라 하여 더불어 혼인하기를 부끄러워합니다. 이미 우리나라 사람인 바에는 마땅히 우리나라 의관을 좇아 별다르게 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혼인하게 될 것입니다. 또 대조회(大朝會) 때 회회도(回回徒)의 기도(祈禱)하는 의식(儀式)도 폐지함이 마땅합니다." -세종 9년(1427)4월 4일-
여기에서 회회교도란 물론 회교도 즉 무슬림입니다. 그들은 무슬림 고유의 복장을 착용하고 궁중의 큰 의식에도 참가해 기도하고 독송하였음을 이 기록은 말해줍니다. 세종이 이슬람의 역법, 천문 지리학, 과학기술을 수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2세기 세계지도를 낳은 시칠리아의 팔레르모가 이문화간의 소통 교류가 활발했던 것처럼 고려말 조선초까지는 우리 땅에서도 개방성과 다양성의 전통이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획기적인 세계지도가 나오기 어려웠을 겁니다. 오늘날 구글 지도가 미국에서 나온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강리도 이후 조선의 문화와 가치관은 주자학으로 고착·획일화되어 갔고 그에 따라 지리적 시야도 축소됐습니다. 더 이상 강리도와 같은 세계지도는 나올 수 없게 됩니다. 중화주의에 눈이 어두워지자 중화권 밖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 배타적 사고로 과거 우리민족이 어떤 대가를 치루어야 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리도의 발자취는 우리의 흥망성쇄를 보여주는 묵시록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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