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추억
이희동
경주의 둘째 날. 아침부터 나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은 평소 어느 여행을 가도 아점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했는데, 이번 경주여행은 그럴 수 없었다. 어제 받은 스탬프 안내서를 모두 채우기 위해서는 2박3일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내린다고 하니 빨리 나서야만 했다.
그런 아빠가 안쓰러웠을까? 스탬프 안내서를 꼼꼼하게 읽던 첫째 까꿍이가 갑자기 선언 아닌 선언을 했다.
"나, 이제 스탬프 안 찍을래."
"뭐? 스탬프 다 찍자며. 어제도 스탬프 찍는다고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갑자기 왜?"
"봐봐. 스탬프 다 찍어서 보내도 상품을 모두 주는 게 아니야. 추첨해서 준대잖아. 그리고 나 그 상품이 뭔지 알아. 신라 역사와 관련된 만화책이야. 별로 관심 없어."
당황스러웠다. 아니 스탬프 때문에 어제 그리 빨빨거리고 돌아다녔는데 왜 갑자기 스탬프를 안 찍겠다는 건가. 누나가 그러자 밑의 둘째와 셋째도 덩달아 안 찍겠다며 아빠 서두르지 말자고 타이른다.
"그래도 한 번 찍기 시작했는데 다 찍어야지 않을까?"
"아니. 상관없어. 스탬프 안내서 가지고 다니는 것도 귀찮았어. 그냥 우리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자."
한 대를 맞은 것 같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스탬프 도장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었다는 것을. 선물을 받든 말든 상관없이 무언가를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직성이 풀리는 내가 오히려 아이들에게 스탬프를 찍자고 조르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오히려 아이들에게 고마웠다. 그래, 무언가를 하다가 그것이 쓸모없음을 깨달으면 중지하는 것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법.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관성을 이기지 못해 버린 시간과 돈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강박관념의 고리를 녀석들은 이렇게 쉽게 끊어버리다니, 어른인 내가 배울 점이었다.
아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스탬프 안내서를 버렸다. 여유가 생기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우리가 여행을 관광지 찍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 아내가 이야기 한 대로 유유자적 거리를 걸으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이것저것 구경하기로 했다. 물론 그래봤자 또 수많은 유물들이겠지만 스탬프가 없는 이상 마음은 어제처럼 바쁘지 않았다.
신발을 던져라
숙소를 나와 우리가 가장 처음 간 곳은 첨성대와 능들이 위치한 경주역사유적지구였다. 신라문화제를 맞아 잔디밭에서는 풍물대회도 열리고 관광객들도 보였지만 어제 휴일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우리는 근처에 주차를 하고 첨성대로 향했다.
이윽고 바로 눈앞에서 보는 첨성대. 아이들은 책에서만 보던 첨성대를 드디어 봤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살펴보았다. 첨성대 중간에 있는 구멍으로 무엇이 보이는지, 진짜 첨성대의 돌은 365개쯤 되는지 등등 배운 대로 첨성대를 훑어보기 바빴다.
그러나 그런 관찰도 잠시. 아이들은 이내 첨성대 뒤로 뻗어있는 잔디밭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곳이 경주든, 능이든, 문화재든 상관없었다. 10살, 8살, 6살 아이들에게는 가족과 함께 어딘가를 놀러 온 것이 더 소중했으며, 이렇게 넓은 잔디밭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