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청헌쌍청헌은 원래 김계행의 장인인 남상치의 당호였다. 김계행은 장인의 숨결이 서려 있는 옛터에 만휴정을 조성하여 그 정신을 이어갔던 것이다.
김종길
늦게 얻은 휴식, '만휴'
만휴정 안에는 그 내력을 알 수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쌍청헌(雙淸軒)이다. 쌍청헌은 원래 김계행의 장인인 남상치의 당호였다.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두 딸을 각각 김한철(金漢哲, 1430~1506)과 김계행에게 시집보냈다. 남상치는 부귀와 거리를 두고 청백의 정신을 지킨 인물로,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곳 묵계로 낙향하여 쌍청헌을 짓고 은일적인 삶을 살았다. 김계행은 장인의 숨결이 서려 있는 옛터에 만휴정을 조성하여 그 정신을 이어갔던 것이다.
김계행은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태장을 당했으나 대사간에 임명됐고, 다음 해에는 옥사에 갇혔으나 대사성과 대사헌에 임명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결국 1500년 그의 나이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묵계에 우거(寓居)했다. 김계행은 이듬해인 1501년 그의 나이 71세 때 만휴정을 지었다. 그는 폭포 위 계곡 가에 자신의 별서를 지어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이른바 '장수지소((藏修之所)'를 경영했다. 그리하여 늦게 얻은 휴식, '만휴(晩休)'를 즐겼던 것이다.
▲만휴정김계행은 자신의 별서를 지어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을 수양했다.
김종길
그 뒤 25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만휴정은 거의 폐허가 되었는데, 1750년경에 보백당의 9세손인 묵은재(黙隱齋) 김영(金泳, 1702~1784)이 중수를 결심하게 된다. 김양근의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를 보면 김영은 김계행이 지은 만휴정 옛터에 절벽을 깎아내는 등 매우 힘들게 공사를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영은 기초 공사로 터만 닦아 놓은 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 둘째 아들 김동도(金東道, 1734~1794)에게 만휴정 중수를 완성할 것을 당부하게 된다. 그리하여 김동도는 1790년 2월에 토대를 구축했고. 3월 22일에 기둥을 세웠고. 3월 30일 사시(巳時)에 상량식을 했으며, 5개월이 소요되어 마침내 만휴정을 다시 지었다.
▲만휴정김계행은 만휴정에서 늦게 얻은 휴식, ‘만휴(晩休)’를 즐겼다.
김종길
오로지 보물은 하나, '청백'
김계행의 호는 보백당이다. 김계행은 68세 되던 1498년에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2리에 해당하는 설못(笥堤)에 살았다. 이때 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당호를 '보백당寶白堂'이라 했다. 그는 일찍이 "우리 집엔 보물이라곤 없는데, 오직 청백만이 보물이다(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고 읊었다. '보백'은 거기서 취한 말이다.
반타석 바위에도 새겨져 있는 이 글은 만휴정에선 꼭 한 번 되새겨봐야 할 글귀다. 만휴정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이 글귀로 대신할 수 있다. 만휴정의 인문 정신은 바로 '청백'이다. 김계행의 자 또한 취사(取斯)인데 공자가 칭찬한 제자 복자천이 청백리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반타석100명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에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는 글귀가 새겨 있다.
김종길
김계행은 81세 되던 해인 1511년 2월에 가족과 친척들이 다 모였을 때 자손들에게 "몸가짐은 삼가고 남에겐 정성을 다하라(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愼 待人忠厚)"며 경계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임종 때에도 자손들에게 청백을 전했으며,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고 미사여구를 써서 묘비를 짓지 못하도록 했다.
처음 만휴정이 지은 지도 5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만휴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변함없는 것처럼 김계행의 아름다운 정신문화도 그 세월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만휴정은 보백당 김계행에게 유유자적한 만년의 휴식 공간이었다. 만휴정은 2011년 '안동 만휴정 원림'명승 제82호로 지정됐다.
▲만휴정만휴정은 2011년 ‘안동 만휴정 원림’으로 명승 제82호로 지정됐다.
김종길
만휴정을 찾는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아낍시다, 만휴정. 우리 모두!"
만휴정 유람기 |
만휴정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한 옛 글로는 석오(石塢) 권병섭(權秉燮, 1854~1939)의 '만휴정 유람기'를 꼽을 수 있다.
"정자는 황학산(黃鶴山) 북쪽 자락의 폭포 위에 있었다. 산 아래에서부터 모든 돌들이 시냇물 바닥에 깔려 있었다. 모두 희고 매끄러운 돌이었고, 끊어진 곳에는 하얀 모래가 펼쳐져 있었다. 정자 아래에 물이 이른 뒤에 양쪽 기슭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가운데가 비어 있어 문을 이루었다.
물이 바위 위로 흘러내리다가 이곳에 이르러 문과 다투다가 급히 떨어져 성내고 노한 기세로 눈처럼 흰 폭포를 이루었다. 그 아래에는 커다란 솥 모양처럼 생긴 웅덩이가 검푸르면서도 깨끗했다. 이러한 기세로 연달아 두 웅덩이가 있는데 깊이와 넓이는 위의 것에 비해 조금 모자란다. 오랜 가뭄으로 폭포가 장엄하지 못했으나 장마 때가 되면 반드시 커다란 물소리를 내며 기이한 볼거리가 될 것이다.
정자에서 술을 마셨다. 국화가 반쯤 피었고 단풍도 조금 붉었다. 숲 속의 새들도 재잘거렸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권병섭의 『석오집』 권8, 「유만휴정기遊晩休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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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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