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의 칠장사에서 찍은 궁예.
김종성
사실 허현준씨가 비판한 궁예 관심법 속에는 긍정적 측면이 적지 않다. 궁예를 싫어하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서 우스꽝스레 묘사해서 그렇지, 궁예가 역사의 패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의 관심법도 결코 가벼이 취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관심법을 내세워 정적을 처단한 행위 자체는 올바르지 않다. 하지만 궁예의 정적이 누구였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궁예가 활동한 9, 10세기의 지배층은 호족이었다. 군주가 부여한 작위에 기초해 지위를 얻는 귀족과 달리, 호족은 독자적인 군사력 및 경제력에 기초해 지위를 얻은 세력이다. 이들과 타협할 목적으로 군주가 관직을 수여하기도 했지만, 그런 관직은 이들의 위상을 결정하는 본질적 요소가 아니었다. 이들의 권력은 어디까지나 독자적 역량에 기초한 것이었다.
발해·신라 남북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활약한 이들 호족들로 인해 우리 민족이 겪은 위기는, 국가가 백성이나 왕실의 관점이 아닌 호족들의 관점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이다. 나라가 엉뚱한 방향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부인을 29명이나 뒀던 것은, 호족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그들과 결혼동맹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후백제 견훤 역시 마찬가지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서는 "견훤은 아내를 많이 뒀기 때문에 아들이 10여 명이나 됐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역시 호족 딸들과 정략결혼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건뿐 아니라 견훤도 호족들에게 휘둘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궁예는 정략결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궁예한테는 강씨 부인 한 명과 자식 두 명밖에 없었다. 정략결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호족과의 타협보다는 호족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예의 나라에서는 호족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견훤·왕건의 나라에 비해 궁예의 나라가 상대적으로 건전했던 것이다.
이렇게 호족의 영향력이 낮았기 때문에 궁예가 제대로 된 재판도 거치지 않고 호족들을 처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현준의 말마따나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도" 오로지 관심법을 내세워 '나는 네 죄를 알고 있다'는 식으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궁예 정권이 호족들의 자금 지원에 별로 의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별로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궁예의 나라에서 호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해도, 호족은 어디까지나 호족이었다. 이들은 일반 평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죄를 짓는다 해도 정상적인 재판 절차로는 이들을 가두기 힘들었다. 법망을 얼마든지 뚫고 나갈 수 있는 세력이었다.
만약 정상적인 재판 및 입증 절차를 통해 그들을 억누르려 했다면, 궁예는 사회개혁을 제대로 수행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관심법을 내세운 숙청 작업의 결과로 918년에 송악(개성) 호족인 왕건의 쿠데타를 자초하기는 했지만, 901년 등극한 궁예가 18년간이나 호족들을 억누르며 신체제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관심법 같은 약식 사법절차로 10세기판 적폐청산을 신속히 진행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1세기에 관심법이라니
결과적으로는 정권을 빼앗기고 역사의 패자가 됐기 때문에 할 말이 없게 됐지만, 궁예의 관심법 만큼은 결코 비웃음을 살 만한 게 아니었다. 명확한 증거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 악용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정상적 사법절차로는 쉽게 청산할 수 없는 기득권층을 억압하는 데 관심법이 유효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자기 손에 피 묻히는 것을 좋아하는 군주는 거의 없었다. 사법권이 군주에게 있었으므로 자신이 직접 사형 판결을 내릴 경우에도, 신하들을 참여시켜 어전회의를 연 뒤 판결을 도출했다.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궁예 같은 인물이 그런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것은, 일반 사법절차로는 기득권층을 제어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관심법을 이용한 약식 절차를 안출해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궁예가 관심법을 동원한 것은 개혁을 밀어붙이는 그의 과단성을 입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화이트리스트 재판에 불만을 품은 피고인이 종이에 끄적거리듯이 비웃을 대상이 아닌 것이다.
허현준씨는 문재인 정부가 그 같은 관심법을 적폐청산에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한때나마 운동권 관점으로 세계를 냉정하게 분석했던 인물의 글에서 나올 만한 것은 아니다. 냉정한 분석의 결과로 나올 만한 진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관심법을 쓰고 싶어도 쓸 여력이 없다. 재벌과 보수를 압도할 여력이 없다. 삼권분립 이념에 충실하다 보니 검찰과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문재인 정부는 궁예 관심법을 쓸 생각도 없겠지만, 실행에 옮길 만한 권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문재인 정부의 객관적 환경으로 보나 주관적 의지로 보나, 관심법 같은 것이 적폐청산에 활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그것을 운동권 리더 출신이 모른다거나 모른 척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궁예 관심법을 문재인 정부에 대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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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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