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장터. 경기도 용인시 한국민속촌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아마 들어 봤을 것이다. 한국사 수업 시간에 나오는 유명한 경제정책, 상업 발달에 크게 기여한 조치로 평가되는 이것은 정조 때인 1791년 나온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음력으로 신해년에 나온 이 개혁 조치는 6대 특허기업, 즉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정부특허 상인)들의 금난전권(노점 단속권)과 전매특권을 폐지함으로써 중소상인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신해통공은 요즘으로 말하면 중소기업을 살리는 조치였다. 이 조치는 관상(官商)으로도 불리는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철폐하고, 사상(私商) 혹은 잠상(潛商)으로 불리는 신흥 상인들의 활동 범위를 넓혀줬다. 김옥근 전 경성대 교수의 <한국 경제사>는 신해통공이 경제에 미친 영향을 이렇게 평가한다.
"신해통공이 발표된 이후, 어용 시전제도가 거의 무너지게 되고 종래의 사상(私商) 혹은 잠상(潛商)으로 불린 비(非)관상 계열의 신흥 상인들의 활동범위가 확대되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하여 상업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사통(私通)이란 단어에서 느낄 수 있듯이, 옛날에는 한자 사(私)가 주로 불법을 의미했다. 이런 사(私)자를 영세 상인들한테 붙여 私商이라 불렀으니, 신해통공 이전에 중소 상인들의 처지가 어땠을지 짐직할 수 있다.
이처럼 중소 상인들을 살려 상업과 경제 발달에 기여한 신해통공은 결코 수월하게 나온 혁신안이 아니었다. 지금 언론에 보도되는 장하성·김동연 의견 차이 이상의 격렬한 내부 논쟁을 거쳐 나온 것이었다.
신해통공을 추진한 쪽은 이 시대의 유명한 재상인 좌의정 채제공이다. 지금의 부총리에 해당하는 채제공은 이때 사실상 총리나 마찬가지였다. 삼정승 중에서 영의정과 우의정이 궐석인 상태였다. 삼정승 중에 한 명만 임명된 상태를 독상(獨相) 체제라 부른다. 채제공은 신해통공 1년 전인 1790년 좌의정에 임명된 뒤 3년간 독상으로서 국정을 이끌었다.
중소기업과 서민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독상 채제공은 시전 상인, 즉 대기업의 독과점 행위를 규제해야 신흥 상업세력을 키우고 '거시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조 임금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소득 불평등이 경제위기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음력으로 정조 2년 6월 4일 치(양력 1778년 6월 27일 치)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민산(民産), 즉 백성들의 재산 혹은 살림이 불균등한 것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고 인식했다. 정조의 인식과 궤를 같이해 채제공은 시전 상인들의 도고(都賈), 즉 독과점을 규제하고 중소 상인들에게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신해통공을 추진하는 명분이었다. 정조 15년 6월 20일 치(1791년 7월 20일 치) <정조실록>에 따르면, 채제공은 어전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 이익을 독점하려고만 드니, 도고(都賈)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된 겁니다. 도고를 없애지 않으면 백성의 삶이 제대로 될 수 없고 백성의 살림도 넉넉해질 수 없고 상인들도 활동할 수 없고 시장도 번성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시장도 번성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전의 독과점을 규제하는 일이 일반 백성이나 중소상인들한테만 이익을 주는 게 아니라, '시장'으로 상징되는 상업계 전체에도 이익을 줄 것이라는 게 채제공의 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