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자선정기심(修身者先正其心)자신을 수양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
이명수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를 궁리하다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다. 일본의 원로 작가 소노 아야코(曾野綾子)의 <계로록(戒老錄)>이다. 우리보다 일찍 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노인들 삶에 대하여 간결한 필치로 정리했다. 2004년 그녀의 나이 41세 때 이 책을 썼는데, 책 내용은 늙어가면서 경계해야 할 것을 중심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주요한 것은 노인이 됐다고 해서 타인이 공경해 주길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가족에게도 마찬가지다. 젊은 세대는 나보다 바쁘다는 것을 명심하고, 러시아워의 혼잡한 시간대에는 이동하지 말라는 것도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에서 65세가 넘으면 지하철을 공짜로 탄다고 하여 스스로 '지공선사, 지공선녀'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모양이다. 그러한 노인복지 정책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혼잡하고 꽉 막힌 출퇴근길을 피해주는 것이 사려 깊은 어른의 마음이 아닐까?
평균 수명을 넘어서면 공직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 관혼상제 병문안 등의 외출은 어느 시점부터 결례하라는 것, 노년의 가장 멋진 일은 사람들 간의 화해라는 말 등이 기억에 남는다. 노인들이 읽으면 정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독을 권하고 싶지만, 정작 읽어야 할 대상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다. 멋지고 아름답게 나이들기를 소망하는 중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사람이 나이 들어 노인기에 접어들면 세 가지를 조신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노욕, 노추, 노망이다. 굳이 부연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단어의 뜻을 이해할 것이다. 한자 '늙을 노(老)'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늙은이의 욕심을 노욕(老慾)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이나 젊은이들의 욕심에 대해서는 크게 탓하지 않는다.
그것은 욕심이 있어야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경쟁력에서 뒤처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생을 계절로 비유한다면 노년은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인생을 정리할 시기이다. 방하착(放下着)은 불교 용어로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노년기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더럽고 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노추(老醜)는 노욕에서 나온다. 좋은 것은 먼저 움켜쥐고, 억지와 욕심이 가득 찬 매너와 인성이 엉망인 노인들은 추해 보인다.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말이 있다. 정신적 성장과 그 완숙기는 육십부터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환갑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도 설익고 유치한 생각들이 들끓을 때가 있다. 이제야 인생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하다. 이제는 어른값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생 1막을 정리하는 즈음에, 인생 2막을 앞두고서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두 가지는 돈 그리고 정체성이다. 돈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노년기에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누가 뭐라해도 돈이다. 현대는 자식이 늙은 부모를 부양하는 시대가 아니다. 세상이 달라진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늙어서 돈이 없으면 십중팔구 자식에게조차 천덕꾸러기가 되어 푸대접을 받는다. 몸이 늙은 후 젊었을 때 노후 준비를 해놓지 못한 것을 후회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자기 힘으로 돈을 모을 수 있을 때 노후를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생각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리 생각하고 젊었을 때부터 노후를 준비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막상 닥쳤을 때 지난날을 후회하다.
실토하자면, 나는 경제적으로 안심할 정도로 노후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은퇴 후 수입이 끊기면 생활의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이 정체성(正體性)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사전적 의미로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런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는 뜻이다. 어찌 보면 참 난해한 단어라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편집부 신입사원 면접을 볼 때 가끔 "정체성이란 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데, 명쾌하게 대답한 사람은 많지 않다.
정체성은 말 그대도 본인의 정체에 대한 인식, 즉 본인이 무엇을 해야 되며, 어떤 위치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성질이다. 사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에 관해서 규정하고 범주를 정하면서 나름대로 자아상을 확립한다. 정체성이 뚜렷하다는 것은 본인이 뭘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고, 정체성이 없다는 말은 본인의 역할을 모르고 어리바리하다는 하다는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정체성의 핵심 요소는 가치관이다. 무엇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양식이 달라진다. 옳고 그름의 판단하는 중심에는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무엇보다 인덕을 쌓는다. 돈이 많다고 노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인심을 잃은 돈 많은 사람 주변에 남는 것은 오로지 돈을 노리는 사람뿐이다.
늙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누구든지 베푸는 사람의 얼굴은 여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이것은 물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찾으면 돈 한푼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언젠가 길을 걷다가 담배꽁초를 나무젓가락으로 줍는 할머니를 보았다. 80세가 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차림새는 깨끗했다. 자발적으로 거리 환경 미화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숭고해 보여서 감동을 했다.
노년에는 노년의 울림이 있는 삶이 중요하다. 비우고 또 비워야 한다. 그래야 채울 수 있다. 돈이나 욕망을 앞세우지 않고서도 보람을 느낄 방도를 찾아야 한다. 마음수양도 좋은 방도일 것이다. '수신자선정기심(修身者先正其心)'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을 수양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마음수양이 깊은 사람은 겸손하고 이해심이 깊으며 친절하다. 늙은 주제꼴에 마음씨마저 영악하고 괴팍하다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겸손하고 친절해진다면 이것은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멋있는 노인이 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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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 21』 3,000만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어둠 속으로 흐르는 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고, 한국희곡작가협회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도 데뷔하였다.
30년이 넘도록 출판사, 신문사, 잡지사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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