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시골집에서 어머니와 필자.
김진석
남도 다녀와서 사나흘을 앓았다. 자고 깨고 자고... 식은땀을 제법 흘렸다. 소년희망공장 배달부를 하면서 4개월가량을 쉬지 못하고 소년희망센터 추진위원회 조직과 스토리펀딩 기획과 연재에 정성을 쏟았더니 체력이 방전된 것이다. 게다가
[희망의 한판승 1화] '경찰이 키운 소년, 경찰이 쫓아냈다'보도 직후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공세에 대응하느라 심신이 지쳤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 죄를 참회한다. 나 역시 형 못지않게 어머니를 미워했다. 어머니가 떠난 뒤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배고픔에 대한 트라우마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년의 눈물도 아프지만 자식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의 눈물도 아프다.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앞에 용서를 구한다.
어머니는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윗마을 남한강변에서 태어났다. 11남매 중 홀로 살아남았다. 어머니는 투전에 미친 홀아비 몰래 상경해 피난민과 살림을 차렸다. 타향살이 외로움과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였다. 열여섯 차이인지 몰랐다. 이북에 처자식이 있는지도 몰랐다. 매파가 속인 것이다. 어머니는 열여덟에 서른넷 이북사내 배천 조씨와 살기 시작했다. 면사포도 쓰지 못했다.
어머니는 산파 구할 돈이 없어 난민촌 하꼬방에서 나를 혼자 낳았다. 탯줄을 혼자 끊었다.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한 어머니는 나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영등포역 앞에서 노점을 했다. 여름에는 냉차와 강냉이를 팔고 겨울엔 오꼬시와 번데기를 팔았다. 등에 업힌 내가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면 앞으로 돌려 젖을 물린 채 장사했다. 생존 앞에 부끄러움은 사치였다.
단속반이 들이 닥치면 물건을 끌고 이고 도망쳤다. 그러다 물건을 뺏기면 울며불며 사정했다.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한다고, 좀 봐달라고 사정했지만 단속반은 봐주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반이 좌판을 걷어찼다. 들쳐 입은 내가 겁에 질려 자지러졌다. 어머니의 눈이 뒤집혔다. 악에 바쳐 단속반의 팔을 물었다. 스무 살 어린 어미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야이, XX야! 네가 뭔데 내 새끼를 울려!"어머니는 천식과 화병을 않고 있다. 형이 술에 취해 울부짖으면 병이 도진다. 고통의 세월이 너무 길다. 이제 그만 서로를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에 걸린 형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의 자식 버린 죄의 시효가 만료됐음을 선언한다. 이 글은 형과의 화해 선언이자 어머니를 그만 용서해달라는 부탁의 글이기도 하다. 기구한 한 여인이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어머니의 유언이다.
"돈 못 버는 못난 둘째를 대신해 수술비를 대주고 매달 생활비를 주면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천사 같은 둘째 며느리야 고맙다. 내가 죽거든 땅에 묻지도 말고 화장하지도 말고 내 시신을 기증해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사용했으면 좋겠다. 자식을 버린 죄 많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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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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