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련 출신으로 1988년 4.26 총선을 앞두고 평민당에 입당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 (왼쪽부터)
민청련동지회
총회 이후 민청련의 활동은 4개의 지역지부에서 자기 지역에서 일어나는 민중생존권 투쟁을 지원하고, 그 과정에서 회원들을 조직해내는 데 맞춰졌다. 그러나 민청련 앞에는 지역 차원이 아닌 전국적 규모의 정치 일정이 다가왔다. 4월 26일 치러질 제13대 총선이었다.
이미 4년 전 12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구름떼처럼 유세장으로 몰려들고 그것이 신민당 압승의 돌풍을 일으킨 것을 민청련 회원들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바였다. 그리고 87년 대선에서 전두환의 후계자 노태우가 당선됐으므로 시민들의 집권 민정당에 대한 거부와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의장단의 주요 임무는 다가올 총선에 대한 투쟁방침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선 투쟁방침을 세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집권 민정당에 대항할 야당이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 김대중이 이끄는 평화민주당, 김종필이 이끄는 신민주공화당의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것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라는 뚜렷한 지역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3당이었다.
운동 세력의 판도 또한 비지, 후단, 독후의 3색 그대로였다. 말로는 각자 반성을 표명했고, 단결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 마음 역시 모두 품고 있었다. 결국 3 세력은 각자의 방식으로 총선에 임하게 된다.
제일 먼저 '비지' 세력이 움직였다. 2월 초, 대선 때 '비지'에 속했던 인물들인 박영숙, 문동환, 이길재, 이해찬 등이 주축이 돼 평민당 입당을 선언했다. 민청련 활동가 출신으로 장영달, 윤여연, 남근우가 함께 했다. 그들의 입장은 대선 때 '비지'를 내세웠던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이 김영삼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므로 운동 세력이 정치권에 진입하려면 당연히 김대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청련 출신으로 당시 민통련 간부로 활동하던 이해찬은 오히려 지역성을 강조했다. 광주 항쟁에 대한 상처, 그리고 피해의식이 깊은 호남인들의 정치적 한을 제도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여 정치력으로 승화시킬 세력은 김대중의 평민당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김대중의 처지에서도 대선 패배의 비난과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터라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운동 세력으로부터의 '젊은 피'를 수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재야 '비지' 세력과 이익이 맞아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독후 세력은 3월 초에 '민중의 당'을 창당했다. 대선 당시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본부'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주축이 됐는데, 총재엔 서울대 출신의 젊은 노동운동가 정태윤이 선출됐다. 민청련 활동가로는 진영효가 여기에 참여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으므로 더는 보수야당에게 의탁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민중 스스로 정치 세력화하여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후단'의 입장을 취했던 일군의 인사들 즉 재야정치인 예춘호 및 학생운동 출신 유인태, 제정구, 원혜영 등이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했다. 이들은 변화된 정세에서 운동권이 제도권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는 '민중의 당'과 시각이 같았지만, '민중의 직접 진출'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그들이 중요시한 것은 지역 색으로 갈라진 3개 지역당 구조의 폐해였다. 따라서 지역 색을 거부하는 참신한 운동권이 정계에 들어가 정치판을 쇄신해야 한다고 자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