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쎄씨봉> 중 한 장면.
제이필름 , 무브픽쳐스 , 영화사 좌중간
담배를 피우면서 걷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내 모습을 본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은 자성의 쓸쓸함이 있다. 40년이 가깝도록 지속한 담배와 질긴 인연을 9년 전에 가까스로 끊었다. 담배를 끊기 전에는 나도 거리를 걸으면서 담배를 즐겨 피웠었다. 그때는 내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피해를 준다는 것을 정말 몰랐었다.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 존재라서 자기 본위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흡연자들도 나처럼 담배를 끊는다면 틀림없이 길거리 흡연만큼은 백안시할 것이다. 유난을 떠는 것이 아니라 비흡연자에게는 담배 연기가 참으로 싫은 것이다. 또한, 아무 곳에나 버리는 꽁초와 내뱉는 가래침도 참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내가 처음 담배를 입에 댄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의 조무래기 때였다. 동네 형들이 담배 연기로 도넛을 퐁퐁 만들어 내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고 멋져 보였다. 강한 호기심이 발동한 우리 꼬마들도 그것을 따라 해보고 싶었다. 꽁초를 주워 어른들이 안 보는 곳에서 불을 붙였다가 모두 역한 담배 연기에 캑캑댔다. 나도 한 모금 빨았다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바람에 바로 땅에 내던져 버렸다. 어른들은 왜 그렇게 맛없고 독한 담배를 피우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학교 때 소위 '노는 아이들'은 단속의 눈을 피해 담배를 피웠다. 거기에는 금제(禁制)와 억압에 대한 반항의 성격이 진하게 깔려 있었다. 교칙을 함부로 깨뜨리는 음지의 파괴 행위는 멋스럽게도 보였고 어른의 세계로 들어선 듯한 착각을 안겨주었다.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이따금 담배를 피워대며 열심히 도넛 만드는 연습을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내가 돈 내고 직접 담배 따위는 사지 않을 것이다'라고. 냄새도 독하고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담배를 돈을 주고 사는 행위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담배 연기 도넛을 멋지게 만들어 내게 되었을 때는 이미 중독이 되어 있었다.
중학생 때 담배를 피우다 걸린 학생들은 주로 얻어맞거나 얼차려를 받았다. 나도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다 적발된 적이 있다. "정학을 당할래, 엉덩이를 맞을래?" 선생님은 양자택일하라고 했다. 몽둥이로 다섯 대를 맞고 한참 훈계를 들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지독한 골초였다. 자기는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적발하여 엉덩이를 때리고 훈계하는 것이었다. 훈계를 들으면서 마음속에서 '자기는 피우면서...' 하는 불만이 생겼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흡연을 단속만 했지, 담배가 건강에 미치는 치명적인 해독에 대한 논리적인 교육은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담배의 해악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남자는 으레 담배를 피우는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은 음악다방의 전성기였다. 각 도심과 변두리 지역에는 담배 연기 자욱한 음악다방은 20대 젊은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유리 상자 안에서 DJ가 신청곡을 틀어주었다.
테이블마다 한가운데는 큼지막한 재떨이가 놓여 있었는데, 재떨이가 꽁초로 수북하게 쌓이도록 피워대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담배는 아주 당연한 풍경이었고 낭만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택시는 물론이고 시외버스나 기차 안, 심지어는 병원 복도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당시 애연가들은 '식후 불연초(食後不煙草)면 만수무강에 지장이 있다'는 농담을 했다.
'사색의 어머니' '고독의 동반자'였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