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1월 1일 연세대 백양로를 행진하고 있는 독자후보론 지지 학생들
민청련동지회
'독후'는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비지'와 '후단'이 다수였다. 그리고 '비지'와 '후단'은 엇비슷한 형세였다. 그러나 6월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선거 승리를 위해서 양 김의 후보단일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비지'와 '후단' 양 진영 모두 공유하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민통련의 '비지' 결정 이후에도 단일화를 위한 재야의 노력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고 여러 형태로 단일화를 위한 시도는 계속됐다.
그러나 민통련 결정 이후에 재야의 분열은 더욱 깊어져갔고, 후보단일화는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형국이 됐다. 재야를 대표하는 '문익환, 계훈제, 박형규, 백기완' 4인 원로들도 이 세 진영으로 갈라졌다. 문익환 목사는 '비지' 진영에, 계훈제, 박형규는 '후단' 진영에, 백기완은 '독후' 진영에 속했다. 다음 세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는 아직 감옥에 있었다. 이들도 감옥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목소리를 전해오고 있었다.
김근태가 보내 온 옥중메시지후보단일화 문제는 민청련에게도 역시 가장 큰 현안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의장단의 회의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을 거듭했다. 김희택 의장과 박우섭, 장준영, 권형택 부의장은 대체로 김대중 씨에 대한 '비지' 입장이었지만 김병곤 부의장은 '후단' 입장에 가까웠다.
민청련의장단은 9월 말경에는 조직 전체가 완전 합의에 이르지 않았지만 대체로 김대중 지지 쪽으로 대통령 후보 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했다. 김병곤 부의장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다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감옥에서 보내 온 김근태 전 의장의 편지가 큰 역할을 했다.
6.29선언 직후 당시 경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김근태 전 의장에게 아내 인재근이 면회를 가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바깥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고민이 시작되고 있는데 대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앞으로 대선, 특히 대통령 후보 문제를 둘러싸고 운동세력 내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일어날 것을 직감한 김근태 전 의장은 이 논의를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김근태 전 의장의 의중을 눈치챈 인재근이 다음 면회 때 녹음기를 가지고 갔다. 면회 때 녹음하는 것은 교도소 측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사항이었지만 김근태만은 예외였다. 당시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혹독한 고문을 견딘 것으로도 유명했지만 경주교도소로 와서도 소내 투쟁에서 항상 앞장서 왔던 터라 경주교도소가 어지간한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녹음은 한 번의 면회 시간에 다 마칠 수 없어서 일, 이주일 간격으로 세 차례에 나누어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