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인천사태를 계기로 삼아 시작된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민통련 폐쇄를 정점으로 극에 달했다
민청련동지회
위축되는 민주화운동하지만 거센 탄압은 운동을 위축시켰다. 탄압이 점점 강도가 높아짐에 따라 민주화운동의 활력은 점차 낮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선전력과 대중 동원력이 미약했는데, 강화되는 탄압은 그를 더욱 약화시켰다.
민청련만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 전체가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를테면 1987년 1월 [민중신문]을 만들던 민청련 선전국은 고민에 싸였다. 통상 1면에는 각종 투쟁이나 집회 기사를 배치했었다. 그런데 집회든 시위든 간에 1백 명만 모여도 1면에 실어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다. 그만큼 민주화운동 진영은 위축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위축되어 있는 터에 악재가 겹쳤다. 11월 1일 수배 중이던 윤여연 전 사무국장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은신 거주지이던 방배동에서 체포돼 남영동 치안본부로 이송됐다. 부인 최경자와 민청련 가족들은 윤여연 구속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면회 요구투쟁에 나섰다. 작년에 김근태 의장에게 저질렀던 고문수사를 또다시 되풀이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아! 박종철힘들었던 86년이 가고 새해가 밝았다. 정권의 강경한 탄압 드라이브는 변함이 없었고, 결국 파탄을 불렀다. 폭압으로 일관하던 철권통치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던 것이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조사받던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이 고문수사 끝에 사망했다. 독재정권은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박종철의 죽음을 32시간이나 숨기고 있던 치안본부는 16일에서야 뒤늦게 "심문 도중에 일어난 단순 쇼크사"라고 발표했다. 수사관의 큰 소리 몇 마디에 놀라 쇼크사 했다는 주장이었다.
사람들은 그 억울한 죽음에 연민을 느꼈다. 또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정권의 거짓말과 파렴치에 분노를 느꼈다. 그리하여 2월 7일에 개최된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추도회가 열릴 예정인 명동성당과 그 일대 시가지는 전투경찰과 사복형사들이 촘촘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리본을 단 추모 군중이 모여들었다. "종철아 잘 가거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 없데이", "종철이를 살려내라", "고문살인 자행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라는 슬로건이 길거리에 나붙었다. 그날 오후 내내 명동, 종로, 을지로, 광교, 남대문 일대에서 시위대와 전투경찰대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오후 2시에 명동성당에서 21번 추모 타종을 울리자, 시내 곳곳에서 자동차들이 추도 경적을 울렸다. 무차별 최루탄 난사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시위대에게 밀리는 현상마저 나타났다. 종로3가에서는 시위대에게 파출소가 점거당하고, 무전기를 피탈당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세운상가 근처에서는 전경이 시위대에 포위되기도 했다.
서울만이 아니었다. 광주에서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추도회 저지 규탄대회를 열었고, 부산에서는 5천여 명의 군중이 남포동과 광복동 등지에서 시위를 벌였다.
대중시위운동은 3월 3일에도 다시 재연됐다. 박종철군 49재를 맞이하여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 대행진」이 개최됐다. 2.7투쟁보다는 못하지만 삼엄한 경찰병력의 그물을 뚫고 시위대열이 형성되었다. 종로 3가와 4가의 길거리, 세운상가 근처, 국도극장 앞 길거리 등지에서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밀고 밀리는 접전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