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초 베키오현재도 피렌체 시청사로 쓰이고 있다.
박기철
시뇨리아는 8명의 최고 위원과 그들의 대표이자 도시의 최고 통치자인 곤팔로니에레로 구성된다. 이들의 임기는 두 달이었으며, 공정한 업무 수행을 위해 임기 동안에는 팔라초 베키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시뇨리아의 자문기구이며 시뇨리아가 제출하는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가졌던 12인의 시민위원회와 16인의 코뮌위원회 등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선출직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선거는 무작위 제비뽑기였다. 하지만 아무나 후보자가 될 수 없었다. 성인 남자 시민들 중 나이, 재산, 가문, 길드 가입 여부, 전과 기록 등을 면밀히 조사해 통과해야만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후보를 추리는 일은 매우 중요했는데, '아코피아토레(accoppiatore,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라는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주관했다.
이들은 5년 마다 인구조사를 실시해 적합한 후보자를 추려 그 이름을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후보자가 누구인지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후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주머니에서 이름이 나왔을 때나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선출 방식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코시모 역시 이런 후보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달랐다. 코시모는 알비치 가문 등 적대 세력의 모함을 받아 피렌체에서 추방된다. 5년 추방령을 받았지만,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1년 만인 1434년 피렌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오티마티(Ottimati, 피렌체의 신엘리트 계층이자 중산층)'라 불리는 코시모의 지지세력이 선거관리위원회인 아코피아토레를 장악한다.
이들은 가죽 주머니에 코시모를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의 이름만 10여 장 들어가게 했다. 자연히 10여 명의 코시모 측근들이 돌아가면서 최고 위원으로 선출된다.
코시모의 뜻대로 움직인 피렌체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들의 의심과 불만이 커졌다. 그리고 코시모가 선거를 조작한다는 고발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시모의 측근들은 방법을 약간 바꾼다. 가죽 주머니에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이름을 집어 넣었다. 예전과 달리 다양한 사람들의 이름이 뽑히고 시민들은 이제 선거가 공정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이름이 뽑혔다고 해서 바로 최고 위원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뽑힌 사람은 다시 최후의 검증을 거쳐야 했다. 실제로 피렌체에 거주하는지, 성실한 납세자인지, 전현직 공직자 중에 가족이나 친지들이 있는지 등을 검증했다. 이를 통과해야 비로소 공직을 맡을 수 있었다.
처음 주머니에서 이름이 뽑힌 사람을 베두토(veduto, '봤다'는 뜻')라고 한다. 그리고 최후의 검증을 모두 통과하고 공직에 선출된 사람은 세두토(seduto, '앉았다'라는 뜻)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베두토만 되어도 굉장히 큰 영광이었다. 베두토로 뽑혔다는 것은 1차적으로 후보자를 추려내는 엄밀한 자격 기준을 통과했다는 것이고, 이는 훌륭한 시민이라는 증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최종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코시모 측은 최후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사람들의 이름만 주머니에 넣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후보들은 베두토에 머물렀다. 하지만 후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이렇게 책임은 질 필요 없이 명예만 누릴 수 있는 베두토가 많이 나오게 된다.
명예를 얻어 기분이 좋아진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베두토로 뽑아준 시스템의 공정성을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게 된다. 그리고 그 와중에 코시모의 측근들은 세두토가 되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
사실 코시모가 곤팔로니에레로 직접 선출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요상하다. 코시모가 추방 당했다가 피렌체로 돌아온 직후, 정적들의 형기를 연장할 때 곤팔로니에레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439년,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이 만나는 역사적인 공의회가 피렌체에서 열릴 때도 그는 곤팔로니에레였다. 모두 정치나 사업적으로 결정적인 시기에만 선출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의심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피렌체는 코시모의 뜻대로 움직였고, 이제 무슨 일이든 메디치 집안과 친분이 있어야 풀린다는 말이 시민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오고 갔다. 하지만 코시모는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다른 부유층과 달리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겸손한 시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