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 무술년 새해 첫 출근길에 오른 시민들이 2일 오전 서울 광화문 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20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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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순간 그냥 가슴을 파고드는 글귀가 있다. 쉽게 이해되면서도 의미가 묵직하여 오래도록 머무는 그런 글귀가 있다.
서울 중구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글판이 붙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지도 꽤 오래되었다. 1991년 희망의 메시지가 글판에 걸린 후로 30년이 가깝도록 계속되고 있다. 계절마다 바뀌는 글귀들은 대체로 시나 책 속의 한 구절을 가져와서 캘리그라피 형식으로 제작되는데, 글과 디자인의 조화도 썩 잘 어울린다.
그 부근으로 갈 일이 있으면 조금 돌아서 가더라도 일부러 광화문 사거리로 가서 걸음을 멈추고 글판을 올려다본다. 항상 느끼는 것은 글귀 선정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할 때는 등을 토닥거려 주는 듯한 따뜻한 위로가, 용기가 필요할 때는 희망의 메시지가, 가슴이 메말라 삭막할 때는 감성을 일깨우는 글귀가 거기에 있다. 나는 그것을 행여 잊을세라 수첩에 적어 놓고 나중에라도 그 글귀의 출전을 찾아본다.
오래전부터 나는 새해 첫날이면 붓글씨로 연하장을 쓴다. 휴대전화를 소유하지 않았기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전화도 하지 않는 평소의 무심함을 조금이나마 상쇄해 보겠다는 심정으로 정성껏 쓴다. 해마다 12월 중순쯤이면 연하장을 쓸 화선지를 사려고 인사동을 찾는데,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서 버스에서 내려 걷는다. 순전히 광화문 글판을 보기 위함이다. 어느 해 겨울 글판을 보는 순간 가슴에 전율이 일었다.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글귀 오른쪽에는 밝은 햇살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두 팔 벌린 청년의 이미지를 배치해 놓았다. 마음을 활짝 열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희망을 담은 디자인이었다. 왼쪽 아래에 작자와 출전이 적혀 있었지만, 내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출판사 편집장을 오래 했으니까 많은 책과 작자를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아는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곧잘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라고 실토하며 방어벽을 친다.
모르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배워서 알면 된다. 그러나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는 것은 잘못이고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의문이 생기면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곧바로 교보문고로 들어가서 작자와 출전을 찾아보았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폴란드의 대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에서 따온 구절이었다. 알고 보니 정말로 대단한 시인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잘 다듬어진 구조와 베토벤의 음악처럼 냉철할 사유"를 갖췄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여름에도 겨울에도낙제란 없는 법.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서로 다를지라도…"진정한 시인은 '모르겠다'는 말 되풀이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