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배포되었던 황정하 추모 전단지 전면
민청련동지회
또한 민청련과 청년단체들은 12월 4일 명동성당에서 황정하 추도미사를 열었다. 추도미사는 명동성당 교육문화관에서 1500여 청년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함세웅 신부가 강론을 하고 서울대학생 백낙현 군의 추도사 낭독, '학원민주화를 위한 카톨릭 학생 선언' 등으로 진행됐다. 미사 후에는 10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성당 밖 100m 앞까지 진출했다.
이 추도식장에서 민청련은 고인의 뜻을 기리는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300원씩에 팔았다. 이 추모카드에 공동성명서 내용을 담았는데, 당시 재정이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지만 성명서를 판매한다는 것이 집회 참석자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호응이 좋았다.
김근태 의장의 수난안기부와 경찰에서는 민청련 간부들을 계속 감시하는 한편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로 위협을 가해왔다. 그 중에서도 김근태 의장이 가장 중요한 타깃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창립총회 때 안기부에 연행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난 이후에도 툭하면 담당서인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 민청련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집회 같은 대외 활동이 있을 때마다 경찰들은 김근태를 연행해갔고, 그 과정에서 구류도 여러 번 살았다.
11월 중순쯤 되었을까. 김근태 의장이 종로서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 사무실로 전해졌다. 아마도 그 직전에 냈던 레이건 방한 반대 성명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실에 비상이 걸렸다.
박우섭 총무와 홍성엽 재정부장이 전화로 회원들을 불러 모으고, 박계동 홍보부장은 언론사에 연락하여 연행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종로 경찰서장에게 전화로 강력히 항의하고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비상을 건 지 한 시간쯤 지나 이해찬, 박성규, 권형택 등 10여 명의 회원들이 사무실에 모였다.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종로경찰서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했다.
실탄이 필요했다. 실탄이란 민청련 입장을 알리는 성명서였다. 우선 급한대로 박계동이 초안한 16절지 한 장짜리 항의 성명서를 쓰고, 연성수 등 집행부원들이 함께 달려들어 수동식 먹지 인쇄기로 200여 부를 인쇄했다.
역전의 용사 이해찬, 박계동이 앞장서고 집행부원들과 회원들 10여명이 뒤따르면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종로경찰서까지 행진했다. 간간히 "김근태를 석방하라!" 구호도 외쳤다. 사무실에서 종로경찰서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연도의 시민들에게는 이 시위행렬이 당시 전두환 철권통치 아래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광경이었다. 종로서에 도착한 이들은 경찰서 마당에서 저지하는 경찰들에 둘러싸였다. 그러자 이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서장 면담과 김근태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고 하는 과정에서 이해찬의 안경이 깨졌다.
결국 민청련 담당이었던 정보과 소속 정아무개 형사가 쫓아 나와 정보과 사무실로 안내했다. 정보과에 들어가자마자 박계동, 이해찬이 주동해서 사무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금방이라도 책상을 둘러엎을 태세로 큰소리로 김 의장 내놓으라며 소란을 피웠다. 한참 소란을 피운 후에야 정보과장이 나와 김근태 연행에 대해 해명했다. 조사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의장의 석방 약속을 받아 내지는 못했지만 민청련의 강력한 항의 의사를 경찰 측에 전했다. 그리고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폭행에 대해서는 종로경찰서장의 사과와 깨진 안경에 대한 변상약속을 받아냈다. 김 의장은 이번에도 결국 구류 3일을 살고 나왔다.
5분대기조 공동번역실이런 긴급동원에는 권형택이 운영하던 공동번역실이 한몫을 했다. 이 번역실은 권형택이 아현동에 있는 선배 박경희(동국대 74학번)가 운영하는 출판사 지양사 옆에 사무실 한 칸을 얻어 운동권 후배 4-5명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번역실은 일반직장에 다니는 회원들에 비해 근무가 자유로운 편이라 민청련의 긴급사태가 있을 때마다 일차적으로 동원되었다.
공동번역실은 권형택이 다음 해 민청련 집행부로 들어가기 전까지 책임자가 되어 1년여를 운영했다. 이 번역실에는 오의택, 진재학, 백병규, 김성환, 최보은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