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뜨겁다. 백 선생님의 웅변은 듣는 이의 가슴에 활활 불을 지핀다.
정택용
두 어른의 몸은 특별합니다.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내신 분들입니다. 백기완 선생님은 독재정권에 수십 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했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은 불의에 맞서다 수년 간 경찰과 용역들에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두 어른의 몸을 들여다보면, 그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밤이면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는 통증을 어금니 꽉 깨물며, 수십 년간 홀로 삭이셨습니다. 그래서입니다. 두 어른은 약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약봉지를 주렁주렁 달고 사십니다.
두 어른은 뜨겁습니다. 모진 세월에 지칠 만도 한데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십니다. 백기완 선생님은 지난겨울 촛불광장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키셨습니다. 문정현 신부님은 대부분 떠난 강정해군기지 앞에서 매일 미사를 드리고 서각을 깎아냅니다. 여전히 두 어른은 현역이십니다.
용산참사 때입니다. 이명박이 용산에서 사람을 죽였을 때, 경찰은 추모행사도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관혼상제는 집시법의 신고대상이 아니어서 집회신고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경찰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용산참사와 관련한 추모행사를 방해하고 집회신고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에 데인 이명박 정권은 용산참사 항의투쟁이 촛불로 번질까 두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주말마다 서울 시내서 열리는 추모행사는 모두 불법집회가 됐습니다.
그때 백기완 선생님이 나서주셨습니다. 추모의 말씀을 해주십사 전화로 부탁드렸습니다.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냐고 사양하시면서도, "박래군 선생이 오라고 하니 나가 볼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백 선생님은 언제부턴지 저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였습니다. 기억하기론 제 나이 50이 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이름을 불러주실 때가 더 정겨웠는데... 아무튼 청계광장에서 열린 추모대회에 나오신 백 선생님은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산참사가 아냐. 용산학살이야. 이명박이 국민을 때려죽인 거야!"
시원하게 지르셨지요. 움츠러들었던 사람들의 기를 살리는 데는 백 선생님의 웅변만한 게 없습니다. 경찰의 원천봉쇄, 언제 침탈당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분위기에서 선생님의 사자후는 사람들의 가슴에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그 뒤에도 어려운 상황마다 전화를 드리면 언제나 달려오셨습니다.
추모대회를 주최했다는 이유로 저는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곳에서, 거리에서 추모대회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자 고민의 저편에서 문 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문정현 신부님, 용산에 와주셔야겠어요." 전화를 드렸습니다. 문 신부님이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오셔서는 용산참사 유가족들을 만나셨습니다. 울보 신부님은 유가족들을 만나자마자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눈물이 채 마르기전, 그 길로 군산으로 내려간 문 신부님은 짐을 꾸려 '평화바람' 식구들과 함께 상경했습니다.
용산참사의 현장 남일당은 매일매일 전쟁터였습니다. 경찰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현장을 짓밟으려 했습니다. 용역들은 사람이 죽어나갔는데도 철거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 신부님은 전경과 용역들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습니다. 여기저기 몸에 멍이 들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하루라도 안 맞고 살아봤으면 좋겠다."문정현 신부님의 말에 피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문 신부님은 허허 웃으시며, 저항의 고삐를 죄셨습니다. 용산참사 현장을 '남일당 성당'이라고 명명하고 본당신부로 이강서 신부님을 앉혔습니다. 자신은 아래로 내려와 보좌신부 역할을 했습니다. 후배에게 자리를 내줄 줄 알고, 정의구현을 위해 몸 바치는 분이 문정현 신부님입니다.
두 어른은 제가 30년 전 인권운동에 투신하기 전부터 온몸으로 현대사를 겪어왔습니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감옥에서, 지하고문실에서 모진 일을 당하셨습니다.
못난 후배의 애절한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