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툰] 史(사)람 이야기 3화: 조선 '걸크러쉬' 김호연재
KBReport.com(케이비리포트 역사카툰)
# 한량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연연치 않은 조선문인 김호연재의 삶송요화, 호연재 김씨 이들 부부는 집안의 결정에 따라 1699년(숙종25년)에 혼인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던 거 같다.
성격 자체가 서로 맞지 않은 듯 한데 그들의 당호(堂號)가 이를 대변해 준다. 송요화의 당호는 소대헌(小大軒)으로 '큰 테두리만 보고 작은 마디에 매달리지 않는다.(見大體不拘小節)'라는 뜻으로 그의 호방한 성격을 알 수 있다.
호연재는 맹자 공손추편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그녀의 당호를 가져왔는데, 담대하고 거침없는 그녀의 호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부부간은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필요한데 이 부부는 그러하지 못했다.
호연재 시집에는 안동김씨 친정 오라버니들과 주고 받은 시는 많지만, 남편과 주고받은 시는 한 편도 없다. 남편을 소재로 한 시조차 3수밖에 없다. 그중 두 수는 남편이 멀리 있는 상태에서 지었는데,〈우음(偶吟:우연히 짓다.)은 송요화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지었다. 마지막 시〈동작(東鵲)도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술과 담배 그리고 시(詩)로 소일하던 호연재는 말년을 병석에 누워 보냈는데, 송요화는 그 무렵에도 설악산에 있는 삼연 김창흡을 찾아가 배우거나 형인 송요경을 따라 다녔다.
당시는 숙종 치세로 당쟁이 격화된 시기라 여러차례 환국이 진행되었고 서인, 남인 막론할 것 없이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 송요화 역시 이런 분위기에 자유롭지 못하고 절망하며 방황한 듯하다.
1718년에 숙부가 세상을 떠나자 집에 돌아와서 삼년상을 지냈지만, 1721년 5월에 다시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호연재는 이듬해 역병이 돌던 5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딴살림을 하면서 형과 함께 어머니를 모셨기 때문에 호연재의 살림은 언제나 가난하였다고 한다. 남편없이 홀로 40명에 가까운 식솔을 책임진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연재의 시에는 시댁, 친정 상관없이 여러차례 쌀과 음식을 빌리며 하소연하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쌀은 주로 벼슬 나간 오빠들에게 꿨는데, 이따금 수령으로 있던 시아주버니 송요경에게 편지를 보내어 집안사정을 알리기도 했다.
다음은 호연재 나이 25살 나던 해 시아주버니 송요경에게 보낸 한글편지이다. 절박했던 그녀의 살림살이를 알 수 있다.
# 김호연재가 시숙 송요경에게 보낸 친필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