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소녀들 사이에서 발레를 배우는 빌리(제이미 벨 분)
UIP코리아
다행스럽게도 나는 내가 속한 노동자 계급 하위문화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을 큰 갈등 없이 거부하며 성장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직업과 관련해서는 예외였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나는 미술대학을 가겠다고 선언을 해서 집안을 발칵 뒤집어놨다. "사내들은 축구나 권투, 아니면 레슬링을 하는 거야. 빌어먹을 발레는 하지 않아!" 영화 <빌리 엘리어트 Billy Elliot>(2000)에서 권투 대신 발레를 하겠다는 빌리를 다그쳤던 광산노동자 아버지는 결국 빌리와 함께 왕립발레학교 오디션에 참가한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은 달랐고, 나는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큰아들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시키길 원했던 부사관 출신인 아버지는 남자가 미술을 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아들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어머니 역시 미술대학 진학을 위해 필요한 별도의 사교육비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시각예술계에 발을 들여놓긴 했다. 하지만 내가 10년이 넘는 길고 긴 우회로를 거쳐야 했던 것은 내가 속한 계급의 남성성에 관한 한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당시 시각대로라면 노동은 남성의 역할이고, 예술은 노동의 포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평범한 노동자들의 아들이, 그것도 장남이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남성성에 있어 치명적인 손실이다. 취향과 스타일의 소비에 있어 기존의 남성성을 위반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노동에 있어 남성성을 위반하는 것은 계급의 경제적 조건상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예술이라는 노동을 선택하면서 그 남성성마저 거부했다.
빌리처럼 발레로 다져진 근육질의 몸이라는 또 하나의 남성성은 갖추지도 못했지만, 심지어 그런 남성성을 사진으로 담는 것도 거부한다. 여성성은 물론이고 남성성의 새로운 전형화와 상품화에도 반대하는 까닭이다. 이 거부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건 누군가건 계속해서 새로운 남성성을 만들어낼 것이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기존의 남성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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