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억공간의 모습.
박장식
'잊지 않겠습니다'... 바꿈으로서 지킨 약속, 하지만 불안전한 면도"오늘은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꼭 2년이 되는 날입니다. 참사 2년, 그 동안에 여러 안전문제점들이 지금은 완벽하게 보완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 그런데도 여전히 불안하다는 보고입니다. - 엄기영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의 2005년 2월 18일 방송 멘트."
다행히도 이 문제를 '정리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상기한 많은 문제점이 해결되었기 때문. 사고의 가장 큰 문제였던 석유 관리의 문제점이 제기됨으로써, 다시금 강한 단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는 그간 고쳐지지 않았던 지하철 난연재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잦았던 열차의 '래핑'이 사라졌고, 의자 시트와 페인트까지, 모든 면에서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지하철에서 큰 화재가 난 사례는 불연재로 교체하기 전 7호선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마저도 한 명의 부상자가 있었을 뿐이다. 또 매뉴얼도 속속 바뀌었다. 화재와 관련된 매뉴얼이 주로 '손'을 보게 되었다. 화재와 관련된 매뉴얼이 바뀌게 되었고, 잘 작동되지 않았던 비상코크도 좌석 밑으로 매설되거나 안전한 공간 안에 매설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소방서와 공조해 지하철역에서의 화재 예방교육이 실시되고, 화재 대피훈련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현재도 전국 지하철에서 '화재 시에는 비상 코크를 열고 문을 열어 대피하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대구 지하철 사고는 많은 변화를 남겼던 셈이지만, '하위직에게만 모든 책임을 넘기는' 사회 풍조만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점이 문제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중앙로역 한켠에 다시금 만들어놓은 추모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이전에 일어났던 사고'를 추모한다는 것이니만큼 사고가 일어났던 그 공간에 추모공간을 조성한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다른 대책에 비해 배워야 할 점이다.
'잊고 있던 제2의 세월호'... 대구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되어야만 합니까? - 엄기영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의 1995년 4월 28일 오프닝 멘트."
그리고 우리가 거의 잊고 있던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1995년 4월 28일, 대구지하철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폭발사고다. 당시 백화점을 건설하기 위해 공사하던 중, 시공업체에서 가스관을 건드려 가스가 뭉친 상태에서 그대로 아침에 폭발해 101명 사망, 202명이 부상당했다.
더욱이 이 사고 피해자에 영남중학교 학생 42명과, 교사 1명이 포함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공사장에서의 지하 배관 확인을 하지 않았던 것, 가스 누출이 확인된 이후에도 안일하게 대처하였던 것 등 엄기영 앵커의 말에 따라 '후진국형 참사'나 다름없었다. 어찌 보면 '세월호 참사'의 원조판이 바로 이 사고였다.
이 와중에도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고 숨진 위인, 버스 내의 승객을 모두 구한 버스기사까지, 엄청난 '위력'을 보여준 의인이 찬사받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언론이 당시 자유민주당의 눈치를 보느라 사건 보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세월호 참사 때 인터넷이 언론의 역할을 많이 했다면, 당시에는 PC통신이 정보의 창구 역할을 했다.
문제는 상인동 지하철 공사장 폭발사고 이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고 후에도 방재대책은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고, 공사장에서의 안전불감증 역시 해소되지 않았다. 동탄 메타폴리스 참사, 그리고 고양종합터미널 참사 등 '후진국형 참사'는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엄청난 청소년들이 사망한 '세월호 참사'까지. 상인동의 참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교훈'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