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길 전 이대총장과 기자(1989. 10. 고사리마을에서)
박도
그 무렵 이화학당 측에서 교내 주차장을 유료화하면서 월 주차비를 대학교수에게는 1만 원을 받는데 견주어, 부속학교 교사들에게는 월 2만 원씩 받아 일부 교사들의 불만을 가득 샀다.
나는 그제나 이제나 운전면허증이 없는, 평생 대중교통만 이용하였기에 그 문제에는 해당되지 않았지만, 그런 차별은 기독교 학교의 근본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처사일 것이다.
전임 김옥길 총장 재임 때는 당신 사저에서 이화학당의 모든 식구들에게 자주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분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분은 오히려 그늘에서 고생하는 청소노동자, 수위, 부속학교 교사 등 낮은 곳에서 수고하는 분부터 먼저 초대했다. 그게 바로 참다운 기독교인의 바른 자세요, 정신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숭고한 이화 정신은 날이 갈수록 점차 퇴색되더니 급기야 교내 문제에 경찰까지 불러들이는, 한 국회의원의 말을 빌리면 '이대 OOO'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듣는 사태에 이른 것 같아 매우 안타깝고 씁쓸하다. 아마도 설익은 벼는 고개를 숙일 줄 모르나 보다.
교직원 해외연수1996년 학년도 말, 나는 아주 황당한 일을 겪었다. 내가 학생회 지도교사를 맡은 해에 민주화 덕분으로 학생회 간부들을 직선으로 뽑았다.
그때 그들이 학생회 임원선거에서 내건 공약 가운데 하나는 '교내 협동조합 설치'였다. 다행히 당시 교장선생님은 학생회장단의 의사를 존중해, 그 이듬해 학생과 교사들의 공동 출자로 교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협동조합이 설립된 이후 교장선생님도, 담당교사도 바뀌더니, 협동조합은 슬그머니 본래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협동조합 물품이 바깥 문구점보다 결코 싸지 않다는 학생들의 불만도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학생들은 등교 후 바깥에 나갈 수 없으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협동조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해 연말 협동조합 이익금은 예년보다 훨씬 많았다. 이는 협동조합 운영을 잘한 게 아니라, 협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빌려 독과점으로 폭리를 취한 것으로 이는 협동조합 설립 취지에 위배된 운영이었다.
그해 연도 말 교사에게는 100%의 현금 배당금을 나눠주고, 학생들에게는 100%에 해당하는 값의 노트를 나눠주고도 이익금이 남았다. 그러자 해당 교사와 일부 간부 교사들은 그 이익금으로 학기 말 교직원 해외연수를 가자는 기상천외의 일을 꾸몄다. 그런 발상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교육자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나는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찌 협동조합 이익금으로 교사들이 해외연수를 갈 수 있느냐고, 담당 교사에게 협동조합 정관을 보자고 말했다.
"같은 교사끼리 협조해 주지 않으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는 나에게 정색을 하며 반발했다. 도대체 무엇을 협조해 달라는 말인가. 나는 하는 수 없이 계통을 밟아 이아무개 교장선생님에게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해외연수의 즉각 중단을 요청했다.
당시 이아무개 교장선생님은 사범대학 유아전공 교수로, 이전에는 부속초등학교 교장이었고, 퇴직 이후에는 어린이육영회 이사장이었다. 그분은 아주 독실한 신앙인이요, 사범대학 교수인지라 나는 그분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판단력을 믿었다. 하지만 이아무개 교장의 답변에 나는 망연자실했다.
"우리 선생님들이 해외 견문을 넓혀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치는 것도, 협동조합 정관에 나온 대로 '이익금은 교육목적에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에 부합합니다." 학년 말 방학 때 대부분의 교사는 교직원 해외연수를 떠났다. 평소 국회의원이나 도·시의원들이 변칙예산으로 해외연수를 떠난다는 보도에 게거품을 물던 교사들도 '나는 예외'라고 떠났고, 돌아온 뒤에도 그 누구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 그 대열에는 성경선생(교목)도, 심지어 참교육을 부르짖던 전교조 소속 교사도 동행했다. 그저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일부나마 우리 교육현장의 한 단면이었다. 하지만 몇 분은 학교 간부와 동료들의 끈질긴 동참 권유에도 끝내 불참했다. 그분들은 사회과 김아무개, 가정과 정아무개, 음악과 김아무개, 그리고 과학(물리)과 엄아무개 교사 등이었다. 이 기록은 그때의 역사이기에 여기 글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