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올림픽개회식 때(오른쪽부터 김 아무개, 한함윤 선생, 기자. 1978. 10.)
박도
그해 여름방학 중, 나는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밤에 한 선배 교사가 우리학교의 한함윤 물리선생님이 사회정화 숙정대상으로 학교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했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이튿날 긴급 모임이 있다고 전달했다.
모임 장소는 중학교 음악실이었다. 나는 그 소식에 무척이나 놀랐다. 그분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물리학과 출신으로 대단히 실력도 있고, 유능한 바른 교사였다.
그런 분이 사회정화 대상으로 숙정명단에 올라가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 모임 장소인 중학교 음악실에 도착하자 10여 분의 선생님이 모두 놀란 토끼 눈으로 모여 있었다. 그간의 경위를 비교적 잘 아는 김아무개 선생님이 전했다. 한 선생님은 방학식이 끝난 다음 집에서 쉬고 있다가 학교의 호출을 받고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등교했다. 그날 학교 측에서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사상 문제라고 트집삼아 사표를 내게 한 다음, 숙정대상으로 몰아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대책 모임에 참석한 선생님들은 '한 선생님은 함경도 태생으로,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한 분인데 이는 말도 되지 않는다'며 분개했다. 신군부들이 자기네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휘두르는 숙정의 칼날에 학교 측이 이 참에 슬그머니 미운 사람을 끼워넣은 것이다. 이는 아주 야비한 짓이었다.
사실 나는 그 무렵 교내 한 자리인 교감 자리를 비롯한 교사들 간 주도권 다툼에는 별 관심도 갖지 않았고, 오직 내가 맡은 일에만 골몰한 채 지냈다. 나는 그 사건 이전 그해 '서울의 봄'으로 사회가 한창 시끄러울 때, 김아무개 교사가 현 교감을 몰아내기 위해 학생을 선동했다는 그런 소문을 들었지만,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거니와 그런 얘기에는 아예 귀를 씻고 외면한 채 지냈다.
하지만 한 선생이 정화대상자로 숙정된 것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그분은 결코 신군부나 언론에서 말한 부패·무능, 그런 것과는 거리가 한참 먼 분이었다. 그래서 '이건 분명 아니다'라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 또렷이 각인돼 있었다.
부끄러운 고백그날 모임에서 갑론을박을 한 끝에 서울시 교육위원회(현 서울교육청)와 국보위(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에 한 선생님에 대한 진정서를 내자는 의견이 모아지자, 모임을 주선하고 대책을 주도했던 김아무개 선생은 나에게 진정서 문안 작성을 부탁했다.
순간 나는 아찔했다. 하지만 그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첫째는 나는 애초부터 안티 현 교감 배척운동에는 관여치 않았을 뿐더러, 그 당시 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집안 내 문제로 전전긍긍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가 그해 정초 신군부를 비판하다가 관계기관에 불법연행된 뒤 그 무렵 실형을 받고 대구 화원교도소에 수감됐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을 상사는 물론 동료 교사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고 근무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 사실이 언저리에 탄로날까봐 결근을 한 채 아버지 재판을 방청도 하지 않았던 불효막심한 자식이었다. 나는 그때 그렇게 하는 길만이 쓰러져가는 집안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련기사 : 시뻘건 난로를 뒤집어쓰고 싶더라... 애비야, 너도 사느라고 욕본다).내가 비겁하게도 그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자 대신 후배 교사인 중학교 국사 담당 정용수 선생이 그 일을 맡게 되었다. 그 진정서에 서명은 개학 전 직원회 날에 하기로 하고, 그날 모두 헤어졌다.
개학 전 직원회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갔다. 교무실로 가자 교감선생님이 교장실로 내려가 보라고 했다. 그래서 교장실로 가자 교장 선생님은 새파란 얼굴로 한 선생 진정서에 서명치 말라고 경고 겸 애원했다. 나는 교장실을 나오며 그래도 약속한 신의는 지켜야 한다고 중학교 음악실로 가서 진정서에 서명한 뒤 직원회에 참석했다.
진정서 서명을 주동하던 김 선생님은 '서명을 하기로 한 선생님들 가운데 교장 선생님에게 설득을 당한 이도 있고, 그날 결근을 하는 등 몇몇 선생이 비겁하게 애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분개했다. 이런 좌고우면자들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