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익희가 마지막 머물렀던 종로구 효자동 가옥
유영호
이 쌍홍문 터를 돌아가면 이내 <해공 신익희 가옥>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신익희는 이곳에서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 숨질 때까지 살았다. 가옥은 대지 47평에 30평짜리 건물이다. 팔짝지붕에 겹처마 한옥인 평범한 도시형 한옥구조이다.
국회의장을 지냈고 숨지는 순간까지 대통령후보였던 이의 집이지만 당시로서도 그저 평범한 가옥이라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그런 곳이다.
신익희는 갑오개혁이 있었던 1894년 출생하여 일본유학을 하였고 3.1운동에 연루돼 체포령이 떨어져 이를 피해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줄곧 항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그 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6.25전쟁이 발발하던 순간에는 국회의장의 지위에 있었다.
이승만과의 악연당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일화가 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의 빠른 남진 속도에 이승만정권은 당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발발 이틀 뒤인 6월 27일 새벽 4시 국회가 소집되어 총 210명의 의원 가운데 100여 명이 모였는데 국회에 참석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조차 당시의 전황을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속에서도 국회의원들은 "국회의원 전원은 100만 애국시민과 더불어 수도를 사수한다"고 결의한 것이다. 그리고 결의문을 전달하기 위하여 의장 신익희와 부의장 조봉암 등 몇몇은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갔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새벽 3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이미 탈출한 뒤였다.
결국 이른 새벽 모여 서울사수를 결의했던 의원들은 이 보고를 듣고 소리없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인 6월 28일 새벽 2시 15분에 한강 인도교와 3개의 철도교량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모두 폭파되고 말았다. 당시 서울인구는 150만명을 약간 넘겼다. 그 중 1/10인 15만명은 한강 이남 즉 영등포에 거주하였다.
한강 이북의 140만명 중 강을 건넌 사람은 약 40만명인데 이중 80%는 월남자이고 나머지 20%는 고급공무원, 자본가, 우익정치인, 군인, 경찰관 가족이었다. 그 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한강을 넘지 못한 서울시민들은 인민군 부역자로 처벌받거나 그렇지 않다는 사상검증을 혹독하게 거쳐야만 했다.
위와 같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현실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고 있다. 여의도국회의사당 본회의장 입구에는 지난 2000년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동상에는 "6.25 한국전쟁 당시 '국회의원들을 우선적으로 피신시켜야 한다'라고 국방장관에게 지시할 만큼 진정한 의회주의자"였다고 쓰여 있다.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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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국회의원들을 피신시켰다고?어쨌든 전쟁시기에 이승만 대통령과 이런 일화를 갖고 있던 신익희가 그로부터 불과 6년 뒤인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과 정면대결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야말로 중세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1956년 3월 5일 자유당의 대선후보 지명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받은 이승만이 돌연 불출마선언을 했다.
이유는 "박력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국토통일을 이룩해 주기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자 자유당은 이승만의 불출마선언을 번복해 줄 것을 대대적으로 촉구하는 관제데모를 연출한다. 경무대 주변, 그러니 지금의 청와대 사랑채 앞 분수대 주변에는 연일 데모대가 몰려 오고 그곳에서 호소문, 결의문 뿐 아니라 혈서를 쓰는 등 그야말로 난리가 벌어졌다.
급기야 2주가 조금 지난 3월 23일 "민심에 양보하여 불출마를 번복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그야말로 중세의 정치쇼이며 엄연한 사전선거운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