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하류 산남리부대 근무 중일 때 기자(1969. 12.).
박도
"2소대장님, 바쁘십니까?""점호만 끝내면 별로. 왜 무슨 일이야?""달빛도 좋은데 소대장님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싶습니다.""청담?""네, 이왕이면 조용한 곳이 좋겠습니다."엉뚱한 제의였다. 나는 그가 얼이 빠진 듯한 좀 별난 녀석이란 걸 이미 전해 듣고 있었다. 일석점호가 끝나면 무료한 시간이라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그럼 10분 후 내 막사로 와."나는 마지막으로 가장 윗 천막 동(棟)인 3소대에서 일석점호를 마친 뒤, 중대 상황실 당번병에게 긴급상황 때 내 막사로 연락케 했다. 내가 막사로 돌아오자 정 병장은 그때 내 막사 앞에서 보름달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 병장, 들어와."나는 거적문을 말아 올린 후 라이터로 램프 등에 불을 붙이려 했다.
"달빛이 좋은데 그냥 두시죠.""그래? 그게 좋겠군."선문답나는 열었던 지포라이터 뚜껑을 닫았다. 무슨 일일까? 저희 소대장을 찾지 않고 굳이 나를 찾은 이유는? 그는 군인답지 않게 '청담'이랬지. 내가 그 까닭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그는 말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그래, 기다리자. 스스로 입을 열도록. 나는 야전침상에 걸터앉았고, 그는 나무의자에 앉았다.
"담배 태우나?""네."나는 그에게 청자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나도 한 대를 빼물었다. 그가 성냥불을 붙여 먼저 내 담뱃불을 붙인 뒤, 돌아서 자기 담배에도 불을 붙었다. 나와 정 병장은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 가도록 피차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마침내 정 병장이 마지막 한 모금을 길게 빨고 꽁초를 바닥에 부빈 다음 재털이에 넣고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김학수 일병한테 2소대장님 얘길 들었습니다. 고교시절부터 소설을 썼고, 국문학과를 나오셨다기에 진작 한 번 만나뵙고 싶었습니다.""그랬어? 아주 좋은 달밤이야."나는 선문답(禪問答)처럼 대꾸했다. 나도 화기소대장과 우리 소대 안 하사를 통해 정 병장 신상은 대충 전해 들었다. 그는 강원도 산골출신으로 ㅅ대 철학과를 중퇴한 뒤 탄광에서 막장생활을 하다가 입대했던 친구로 동부전선에서 근무 중 파월했다.
그는 1년간의 월남 파병생활을 마치고 잔여 기간의 복무를 마무리하고자 얼마 전에 우리 중대로 전입해온 자였다. 그런데 화기소대장 얘기로는 한밤중에 헛소리를 지르는 등, 정신이상자라고 했다. 그래서 야간 잠복근무를 내보내지 않고 내무반 근무만 시키고 있었다. 그 며칠 전 화기소대 박한진 소위는 중대장에게 그의 후송을 건의한 바가 있었다.
"2소대장님,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나는 처음 그가 면담을 요청할 때부터 다소 긴장은 했지만, 느닷없는 의외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너와 나, 피차 군복을 입은 주제에, 게다가 대남방송이 들리는 최전선에서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인간은…인간은 말이야. 인간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야."나는 지극히 모호한 말로 얼버무렸다. 궁색한 내 답변이 겸연쩍어 슬쩍 그를 쳐다봤더니 정 병장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