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는 내게 짜이를 끓여 내주고 그 귀하다는 석청까지 내주었다.
송성영
불쑥 찾아온 낯선 손님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말없이 빙글빙글 웃기만 하던 그의 아내는 살림도구가 진열되어 있는 허름한 찬장에서 분말 우유를 꺼낸다. 우유와 말린 찻잎을 넣은 검게 그을린 청동냄비를 화덕 위에 올린다.
노인은 안나푸르나 트레킹하는 외국인들이 수없이 오고 가는 란드룩에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나마 몇 마디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이들 노부부에게는 4남 2녀, 여섯 명의 자식이 있는데 두 아들이 한국에서 일한다며(혹은 일했다며) 노인은 서툰 영어 몇 마디 섞어 온 몸으로 말한다.
"자녀분들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영어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지 그는 온몸으로 재봉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는 듯싶다. 봉제 공장의 '미싱'를 떠올리는 순간 1970년대 일요일도 제대로 찾아 먹지 못하고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렸던 미싱사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1970년 겨울, 서울 청계천 평화 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스물 두 살의 청년, 전태일 열사를 떠올렸다.
지금은 봉제 공장 재봉사들이 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지만 네팔 노인의 아들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사업주를 잘못 만나면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온갖 천대를 받아가며 일하고 있을 것이었다.
"두 아들은 아직도 한국에 남아 있습니까?""아니요. 하나만 한국에 있습니다."지난해 한국에서 돌아온 아들은 서울에서 번 돈으로 포카라에서 장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짜이를 마시고 나자 그는 페트병을 열어 거기에 담겨 있는 뭔가를 병뚜껑에 따른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내밀어 보라고 한다. 손바닥에 따라준 그것은 꿀처럼 달콤했다. 그 달콤함이 너무 강해 혓바닥을 씁쓸하게 자극한다.
"꿀인가요?""예 맞습니다."그는 높은 절벽을 타고 내리는 몸짓을 보이며 거기서 채취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의 야생벌꿀, 석청(石清)이다. 언젠가 히말라야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석청을 채취하는 과정을 본 적이 있다. 절벽 위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가 아주 사나운 벌들을 쫓아내가며 석청을 채취하는데 그 과정이 매우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