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가득 덮은 울창한 잎사귀들
황보름
눈 앞에서 타고 가야 할 버스를 놓쳤다. 아침 출근 시간에 버스를 놓친 것처럼 짜증과 한숨이 동시에 목구멍을 데운다. 휴, 40분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대로 앉아 버스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다음 정류장까지 걸어갈 것인가. 역시, 걷는 게 좋겠다.
협재해변을 지나 금능해변을 지나 차도를 따라 죽 걸었다. 아직 10시도 안 된 시간이건만 태양은 이미 오후의 뜨거움을 뿜고 있다. 30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몸이 지친다. 때마침, 저만치에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저기서 기다리면 되겠지? 40분마다 오는 버스니 10분 안엔 도착할 것이다.
의자에 터덜터덜 앉아 10분이 훨씬 넘게 기다렸지만 오지 않는 버스. 이젠 내맘같지 않은 버스 때문에 짜증을 내지 않기로 한다. 내가 엉뚱한 곳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또…또…이게 제주 버스의 쓴 맛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버스정류장 바로 뒤에 있는 리조트로 콜택시가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15분 정도 걸린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15분 정도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다.
오늘 가려는 환상숲곶자왈은 해설사가 있다고 해서 선택한 곳이다. 환상숲곶자왈에선 매 시간마다 해설사가 관광객들에게 숲 해설을 해준다고 했다. 아무래도 혼자 들어갔다가 또 저번처럼 겁에 질려 뛰쳐나오지 않으려면 함께 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았다.
처음에 사람들이 곶자왈, 곶자왈 했을 때는 사려니 숲이나, 비자림처럼 숲의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곶자왈은 이를 테면 '산' 같은 거였다. 백두산, 한라산, 설악산, 그 외 많은 산이 있듯 곶자왈도 여러 곶자왈이 있었다. 지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주에만 있는 제주 특유의 원시림을 곶자왈이라 부른단다.
15분이 안 돼 택시가 도착했다. 뒷자리로 올라타며 기사 아저씨에게 말했다. "환상숲곶자왈로 가주세요." "네." "그런데 11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까요?" "네, 맞출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다. 11시를 놓치면 꼬박 한 시간을 기다려 12시 해설을 들어야 하니.
벌써 얼마 전부터 내 몸의 에너지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어디에 앉기만 하면 바로 잠이 쏟아졌고, 대체로 몽롱한 채 하루를 보냈다. 가뜩이나 저질체력인 애가 3주가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빨빨대고 돌아다니고 있으니 이럴 만도 하다. 몇 개월, 또 많게는 1년이 넘게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강철체력인 걸까.
택시 뒷좌석에 앉자마자 저절로 눈이 감겨왔다. 차창밖 풍경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무거운 눈꺼풀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잠에 들려하는데…기사 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어디서 오셨어요?""…아…서울이요.""십중팔구는 다 서울 사람이죠.""곶자왈엔 왜 가는 거예요?""아, 제주의 원시림이라고도 하고…또 좋다고도 하고…그래서요.""제주에선 어디 어디 가봤어요?""많이 가봤는데…오래 여행 중이라서요.""제주가 많이 변했어요.""네, 그런 것 같아요.""나는 여기서 태어났어요.""아, 그러세요?""그래서 아주 화가 나요.""왜요?""제주가 너무 많이 변했거든. 인간성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아주 화가 나요."아저씨는 운전을 하며 웅변을 하듯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내가 듣고 있는지 않은지는 별 상관이 없는 듯했다. 아저씨는 제주가 너무 변화에만 집착하는 것 같다고 했다. 중국 자본이 몰려오면서부터는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단다.
엄한 땅값만 올라가는 통에 원래 살던 사람들만 피해란다. "집은 팔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살려고 사는 것"이라고 아저씨는 말했다. 아저씨는 내게 월정리 해변은 가봤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땠냐고 묻길래, 예쁘긴 했지만 거기도 많이 변한 곳이라고 들었다고 대답했다. 아저씨는 월정리 해변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런 델 좋아하니까. 예쁜 곳. 자연을 거슬러도 상관없는 거죠, 그렇죠?""뭐…, 그렇죠."아저씨는 내가 지금 가는 곶자왈도 사유지라고 말해줬다. 나는 곶자왈이 사유지인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제주의 허파라 불리는 곶자왈이 사유지가 되면 그 주인 마음대로 이리 고치고, 저리 고칠 수 있게 되는 거라고 했다.
나는 문득 섭지코지의 그 황망한 레스토랑이 떠올랐다. 주위 경관을 완전히 망쳐버린 그 레스토랑처럼, 그 무언가가 곶자왈도 그렇게 망쳐버리면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 환상숲곶자왈의 경우엔 제주도와 사유지 주인 사이에 어떤 약속 같은 것이 있었다고 아저씨는 말해줬다. 마음대로 곶자왈을 해치지 않겠다는 그런 약속이랬다. 그나마 다행이긴 했지만,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이 길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곶자왈에 간다는 설렘이 사라지고 있었다.
"제가 지금 제주를 여행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아저씨 말을 들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괜히 놀러와서 제주를 망치는 게 아닌가 하구요.""아, 그건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제주 사람들 중 여행업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그냥, 우리가 바라는 건 제주에 좀 관심을 가져달라는 거예요. 제주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그 변화가 제주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한 명, 두 명 여행오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에요. 나는 그 사람들이 진짜 제주를 보고 갔으면 좋겠어요." 아저씨의 이야기는 계속 됐다. 이야기는 뻗어나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까지 와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곶자왈 입구에 다다랐다. 아저씨는 미터기를 정지시키고 잠시 더 이야기를 하다가 마무리를 했다.
"어렵죠? 이게 다 철학에 관련된 거에요. 철학.""네, 철학!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나는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하고 택시 문을 닫았다. 앗, 시간을 보니 11시가 조금 넘어있다. 매표소로 달려가 표를 사자 매표소 아주머니가 얼른 따라가라고 말씀해 주신다. 사람들도 방금 들어갔다며.
말솜씨 좋은 해설사를 따라 곶자왈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