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쉼터 한국어교실매주 일요일 한국어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들
고기복
러이가 한국에 왔을 때인 2008년은 글로벌 경제위기로 많은 회사들의 경영이 어려울 때였습니다. 처음 천안에 있는 자동차 부품회사에 배정받았지만, 회사는 일감이 없어 기계를 놀리고 있었습니다. 많은 한국인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들은 그만 두겠다고 해도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고 붙잡아두었다고 합니다. 외국인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은 고용주의 동의가 없으면 근무처를 옮길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는 언제 회사가 정상화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영상 이유로 해고했다가 인건비가 싼 이주노동자들을 재고용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었던 것입니다.
"이주노동자쉼터는 그저 지나가는 곳이 아니다"
그 회사에서 러이는 2년 동안 돈도 못 벌어 친구와 이주노동자 지원 단체의 도움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그때 러이가 도움을 받았던 곳은 규율이 엄격했던 것 같습니다. 단체를 이용할 때 반드시 입소와 퇴소 절차를 지키도록 했다고 합니다.
2년을 허송세월했던 러이는 그 뒤 3년 동안은 한 번의 근무처 변경 외에는 큰 문제없이 열심히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한 번 고향을 다녀 온 러이는 하나 뿐인 여동생이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고, 2층짜리 집도 번듯하게 지었습니다.
"베트남에 있을 때 75킬로요. 지금 58킬로입니다. 1킬로도 안 늘어요.""일이 힘들어서 살 빠졌어요?""아닙니다. 생각이 많습니다. 고향 생각. 일 생각. 결혼 생각""결혼은 언제 할 거예요?""5년 뒤요. 35살입니다."서른다섯이면 베트남에서 결혼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지만, 모아놓은 돈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러이의 설명이었습니다. 7년 동안 앞뒤로 2년씩 회사에 일이 없거나,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게 보낸 그는 희망찬 5년 뒤를 꿈꾸며 살 빠지는 것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런 러이와 말을 할수록 특이한 언어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소나 전화번호, 단체 대표 연락처 등을 물을 때 꼭 '우리'라는 말을 앞에 붙이고 물었습니다.
"우리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여기요?""네."'우리'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건지, 그 용도를 정확히 모르는 건지 모르지만, 굳이 고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가는 러이에게 이주노동자쉼터는 그저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마음 두기도 하고, 정이 가는 '우리' 쉼터일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함께 더불어 살기를 꿈꾸는 이주노동자쉼터가 모든 이주노동자들에게 '우리 쉼터'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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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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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35살에..." 베트남 청년 '러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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