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7년 봄, 나는 미주리 대학에서 내분비선학(Endocrinology)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12년,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3년여 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찰스와 딸 헬렌을 두고 있던 나에게는 생애 최고의 봄날이었다.
한도원
박사과정 공부는 하면 할수록 흥미로웠다. 터너 교수 밑에서 내가 하는 공부란, 쉽게말하면 어떻게 하면 각종 호르몬을 포유동물에 투입하여 젖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특정 호르몬을 투입하거나 여러 호르몬을 배합 투입하여 젖의 생산량을 높이고자 하는 연구는 당시 미국은 물론 구라파 국가 등 서구 선진국의 내분비선 학계에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초 벼농사 중심의 가난한 한국을 생각하고 농학을 공부하려던 나는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는 또 다른 방안이 동물들에서 나오는 먹거리를 어떻게 증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집중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게 되었다. '전혀 다른 방향'이란 인구의 자연 증가를 억제하여 한정된 먹거리의 몫을 늘리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증산'을 염두에 둔 '호르몬 조절' 연구는, 역으로 '감산'을 연구하는 학문인 피임과 필연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박사과정에서 집중 공부한 호르몬 조절에 관한 연구는 나중에 나의 전문분야가 된 경구피임약 개발로 귀결되었다.
포유동물의 호르몬 조절을 통한 먹거리 증산과 관련된 실험의 한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보통 쥐 한 마리는 14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다. 이 가운데 6마리는 없애고 8마리만 남겨둔다. 이 새끼 쥐들을 어미 쥐와 밤새 격리시켜 놓고 다음 날 새벽에 1시간 정도 젖을 먹여 몸무게를 재어 전체 새끼 쥐들이 흡수한 젖의 양을 측정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어미 쥐에 특정 호르몬을 투입하고,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새끼 쥐들에게 젖을 먹인 뒤 새끼 쥐들의 전체 몸무게를 다시 측정한다.
결국 두 차례의 서로 다른 실험에서 측정된 새끼 쥐들의 몸무게의 차이를 통해 특정 호르몬이 어미 젖을 증가시키는데 얼마나 효력을 발휘했는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연구는 서로 다른 호르몬제를 투여했을 때 젖의 양이 어떻게 달라지느냐에 대한 것으로, 장래에 획기적인 호르몬 발견 또는 개발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당시 나의 학업 가운데 한가지 예를 들었지만, 어떤 과목의 수업이든 나의 관심 분야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느냐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었다.
박사과정 중 가장 힘들게 공부한 과목은 생화학(bio-chemistry)이었지만, 대부분의 과목들은 매우 즐겁고 재미있게 공부했다. 이렇게 해서 박사학위 필수 과목들을 마치고 논문을 쓰기 전 마지막 관문인 어학시험과 박사논문 자격시험(qualifying examination)을 남겨 두었다. 당시 상당수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두 가지 외국어가 필수인 어학시험에 떨어져 낙오되는 경우가 많아서 바짝 긴장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택한 나는 1년여의 공부 끝에 교수가 지정해준 독어 불어 전공 서적을 번역하는 어학시험을 통과했고, 전공분야 과목을 테스트하는 박사논문 자격시험도 무사히 통과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논문이었으나 논문도 큰 어려움 없이 끝낼 수 있었다. 평소의 실험 결과를 논문 작성 지침에 따라 정리하는 정도였다. 논문 최종심사는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지도교수를 비롯한 6명의 심사위원 교수들이 소회의실에서 1시간 정도 최종 심사(디펜스)를 마친 후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안으로 들게하더니 "닥터 한, 축하하네!"라며 악수를 청했다. 마침내 내 전공분야의 박사가 된 것이다. 1967년 봄, 미국에 도착한 지 12년,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2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찰스와 딸 헬렌을 두고 있던 나에게는 생애 최고의 봄날이었다.
그날 우리는 집에서 조촐한 자축 파티를 했고, 나는 한국의 장인어른에게 전화하여 학위 취득을 알렸다. 귀한 딸을 '삼팔 따라지'에게 결혼시키고 내심 못마땅해 하시던 장인어른은 크게 기뻐하시며, "영어를 배워 딸과 손주들을 보러 미국에 가겠다"고 하셨다. 애석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인 어른은 별세하여 미국에 오시지 못했다. 그해 봄 아내도 미주리 대학에서 가정경제학 석사를 취득하여 겹경사가 났다. 두 아이들을 키우며 아르바이트 잡일로 나를 뒷바라지하고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아내가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미주리의 봄날... 나는 박사, 아내는 석사아내와 함께 학위를 마친 우리는 일단 한국의 대학에 일자리를 알아보기로 하고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몇몇 한국인 교수들과 서울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날아든 소식은 하나같이 실망스러운 소식들이었다. 나의 전공분야의 자리가 많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학연'이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자리가 있다 하더라도 우선적으로 자기 학교 출신을 뽑기 때문에 나에게 차례가 돌아오기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교를 합격하고도 '뿌리도 없고 돈도 없다'며 입학을 거절당한 처지에서 유학을 왔고, 대학과 대학원을 모두 미국에서 마친 내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공부하느라 빚까지 지고 있던 우리는 미국 여기저기에 일자리 응모 원서를 보냈다. 하지만 어느 곳도 오라는 데가 없었다. 학위를 마쳤으나 당장 렌트비와 식구들 입에 풀칠을 걱정할 처지가 되니 당황스러웠다. 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몇몇 연구소에 박사후 과정(post-doc) 일자리를 응모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스턴의 워세스터 재단 (Worcester Foundation) 연구소에서 포드 재단 펠로십(Ford Foundation Fellowship)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비록 대형 회사나 대학은 아니었으나 내가 하던 전공분야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1년에 8500불이라는 거금을 제공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일반 대학이나 연구소의 박사후 과정 급료가 연 6000불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화창한 봄 어느 날, 우리는 이사짐차(uhaul)를 빌려 보스톤으로 대 이동을 해서는 전혀 새로운 터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의 전공 분야를 더욱 살찌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렜다. 실험생물학(Experimental Biology) 분야의 유명 연구소인 웨세스터 재단은 번식생물학(reproductive biology) 분야의 대가들이 초빙되어 강의를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생물학도라면 한 번쯤 와서 연구하고 싶어하는 연구소였다. 특히 최초로 경구 피임약을 개발한 연구소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정식 일자리를 구하다 우연처럼 얻게 된 워세스터 재단에서의 박사후 과정은 나의 장래 직업에 중대한 지렛대 역할을 해 주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장래 전문분야가 된 피임약 개발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워세스터 재단은 '여성은 자기 몸의 주인'이라는 기치와 함께 산아제한 운동의 선구자이자 여성해방운동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마가렛 생어가 적극 지지하고 후원하는 연구소였다.
생어는 워세스터 재단의 석좌 연구가로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된 적인 있는 그레고리 핑커스(Gregory Pincus)를 찾아가 먹는 피임약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며 여성을 임신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당시 핑커스 박사는 호르몬 조절로 임신을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등 경구 피임약 개발의 대가로 알려지면서 여성해방운동가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핑커스 박사는 호르몬을 조절을 통한 피임약의 개발을 위해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있던 중국 출신의 생물학자 엠시 챙(MC Chang)을 데려올 정도로 경구 피임약 개발에 대단한 열정을 쏟고 있었다.
결국 산아제한을 위한 모금운동 등을 벌여오던 생어를 비롯한 여성해방운동가들과 포드 파운데이션의 적극 지원에 힘입은 워세스터 재단은 막대한 자금으로 경구피임약 개발에 앞장서게 되었고, 1960년 이에 성공했다. 이전에 여성의 난자에서 나오는 호르몬인 프로제스트론(progestron)을 주사액으로 만들어 여성의 몸에 투여했던 것에 비하면 획기적인 것이었다. 프로제스트론은 기본적으로 난자 생산을 방지하는 호르몬으로, 그레고리 핑커스와 엠시 챙의 연구결과에서 입증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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