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간 주립대학. 욀리엄 댄포스 재단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농공학을 공부하면서 고국의 피폐한 농촌을 되살리고자 하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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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댄포스 재단의 후원으로 나는 1956년 가을학기에 미시간 주립대학 농공학과에 등록했다. 미주리 사우스 웨스턴 주립대학에 비하면 미시간 주립대학은 규모 면에서부터 엄청 큰 차이가 났다. 차로 학교 외곽을 한 바퀴 도는데도 30분 정도나 걸릴 정도로 학교 부지가 넓었고, 농대는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의 주립대학들이 출발 당시 농대를 설립하는 조건으로 정부가 무상 또는 헐값에 제공하는 부지에 세워졌기 때문이기도 했고, 미시간 주정부가 정책적으로 미시간 주립대학 농대를 집중 지원한 덕분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 기숙사에 둥지를 틀고는 매일 농대 건물까지 20여분간을 달리다시피 해서 수업에 들어 갔다. 학교를 가로지르는 좁은 강을 따라 바삐 걸음을 옮기면서도 항상 전날 들은 수업 과목 내용을 복기하거나 이런 저런 학업관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새로 듣게된 과목들은 모두가 생소한 내용이어서 너무 힘에 부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한국전을 전후하여 속성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지로 애초에 기초가 부실한 처지에서 유학을 왔고, 본격적으로 전공 과목을 영어로 듣고 쓰고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사우스웨스턴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들었던 교양과정은 차라리 애교 수준이었다. 얼마나 수업 내용이 어렵던지 10월 중순께부터 갑자기 바람과 함께 휘몰아치는 미시간 눈발 만큼이나 혹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장실에서도 길을 가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할 정도로 공부에만 몰두해야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아침을 제대로 챙겨먹을 시간이 없어서 도넛츠를 입에 문 채로 오물거리면서 넒은 교정을 가로질러 가던 기억이 생생하다.
미시간 주립대학을 품고 있는 이스트 랜싱이라는 도시는 한마디로 '드라이 시티'였다. 가끔 가을철 풋볼 시즌에 풋볼 구장 둘레의 넓다란 잔디에서 차 뒷문을 열어놓고 테일게이트 파티가 벌어지며 떠들썩 하기는 했지만, 학교 내에서는 물론이고 시내에서 조차도 술을 팔지 않았다. 공부에 지친 학생들은 주말에 시 외곽 다른 도시로 빠져 나가서 맥주 파티를 벌이곤 했다. 차가 없었던 나는 시내 밖으로 나가기가 힘들었고, 수업을 따라가기에도 바빠 농대 건물과 기숙사만 왔다갔다 했다. 첫 학기에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도시 밖으로 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당시 한인 의사 닥터 치 (DR. Chie)가 운영하던 작은 병원에 가서 아르바이트 일을 했다. 윌리엄 댄포스 재단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추가 경비가 더 들어갔던 탓이다. 한편으로는 언제까지나 댄포스 재단의 도움만을 기개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어느덧 이력이 붙어 있던 탓이기도 했다. 당시에도 50여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던 탓에 종종 바베큐 파티에 참석하여 외로움을 달래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첫학기를 정신없이 마치고 나니 '농학'에 대한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특히 전공으로 택했던 농공학(Agricultural Engineering) 분야만으로는 한국의 농촌을 기계화할 수 없다는 깨달음이 와서 농기계학(Agricultural Mechanics)도 함께 공부하기로 했다. 농공학이 농기계를 디자인하는 학문이라면, 농기계학은 농기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이들 분야 외에 토양학 교배학 번식학에 관련된 과목들을 들으며 일단 농학 전반에 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로 했다.
나는 미시간 중부의 '드라이 시티'에서 공부로 젊음을 불태우며 피폐한 고국의 농촌을 생각하며, '모두를 잘 먹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갓 24세, 나의 젊음은 농학의 신비한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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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도시'에서 '모두를 잘 먹이는'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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