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집의 오랜 역사를 전하는 노거수 향나무.
김종성
보존 가치가 높은 중요 민속 자료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마을이었다. 마을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우리나라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이곳 양동마을 뿐이다.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꼽았던 '영남의 4대 길지'는 이곳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도산의 토계부근, 안동의 하회마을, 봉화의 닭실마을이라고 한다.
500년 역사의 양동마을과 마을 앞 안강 들녘은 지금도 예전과 다름이 없다. 이렇게 양동마을이 오래도록 우리 전통 마을의 면면을 고스란히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임진왜란부터 6.25 전쟁의 화마를 운 좋게 피해간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문화 해설사는 여기 모여 살던 옛 선비와 학자들의 학구열이 중요한 하나의 이유일 거란다. 안락정이나 강학당 같은 옛 학교들이 이를 입증한다. 많은 학자와 선비가 이 마을에서 배출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마을길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주민들 뒤를 따라 나도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분들이지만 어찌나 다리 힘이 좋은지 웬만한 언덕쯤은 안장에서 내려오지 않고도 올라가신다.
마을 길 외에도 작은 오솔길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오솔길을 따라 숨바꼭질 하듯 숲 속에 숨어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는 일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걸을 때보다 살짝 시선이 높은 자전거 안장 위에서 보이는 집집 풍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옹기 굴뚝의 풋풋한 자연미, 사당 앞 향나무의 단아하고 엄숙한 분위기, 둥근기둥과 조화를 이루는 안채의 대청마루, 사랑채 마당의 예쁜 꽃과 문간채 기왓골의 어울림, 탁트인 'ㅁ'자형의 안채에 남아있는 우물터... 무엇하나 자연스럽지 않고 인간미 넘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옛 선비들이 추구했다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은) 분위기 그대로였다.
백 번을 참고 또 참아내야 했던 종가댁, 서백당마을 길을 거닐다 만나는 여러 고택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은 집이 있다면 바로 '서백당'이다. 우리 옛 조상들은 사람 이름을 좋은 뜻의 글자로 짓듯이 집에도 좋은 뜻을 지닌 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당호다.
이 고택은 경주 손씨 큰 종가로 이 마을에서 시조가 된 양민공 손소(1433∼1484)가 조선 성종 15년(1454)에 지은 집이다. 햇수를 따져보니 무려 560년이나 된 이 집은, 양민공의 외손인 이언적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一자형 대문채 안에 ㅁ자형 안채가 있고, 사랑채 뒷쪽 높은 곳에 신문(神門)과 사당이 있다. 안채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고,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사랑방과 침방이 대청을 사이에 두고 'ㄱ'자형으로 놓여 있는 사랑채 뒷편 정원에는 수백년 묵은 향나무가 살고있다.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춘 고택이라 할만했다.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하여 조선 전기의 옛 살림집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월성손동만씨가옥(月城孫東滿氏家屋)'이었으나, 사랑 대청에 걸린 편액인 '서백당(書百堂)'을 따서 '양동 서백당'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서백당(書百堂)이라는 집의 이름도 '하루에 백번을 참을 인(忍) 자를 생각하며 살면 행복이 오고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뜻을 지녔다고. 손씨 집안을 지키는 대종가(시조의 제사를 받드는 제일 큰 종가)의 종손이라면 그만큼 온갖 어려운 일들을 참고 집안의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는 당부의 뜻이리라.
서백당의 만만한 문턱을 넘어서면 마당에 남녀가 내외하는 경계라는 낮은 '내외담'이 보이고, 그 옆으로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나타난다. 사당으로 가는 마당에 살고 있는 560살이 넘은 커다란 노거수 향나무는 단연 이 집의 상징이다. 용트림하듯 뒤틀린 특유의 신묘한 몸체 또한 집 당호처럼 참고 또 참고 인내해서 그런가 싶다. 향나무는 반드시 사당 앞이나 선비들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노인의 주름처럼 깊이 패여 연륜이 깊어 보이는 향나무는 그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 고목 향나무 때문일까, 집이 으리으리하지 않지만 집 곳곳이 정갈하고 기품이 배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