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4월 미국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교수 및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여자가 나에게 재정보증서를 보내 준 앤나 블레어(Anna Blair)교수이다.
한도원
그런데, 입학 허가서를 보낸 25개 대학들의 대부분에서 '불가' 서신들을 받기만 하던 어느날, 행운의 편지를 받았다. 사우스 웨스턴 미주리 주립대학(현 미주리 주립대학)의 앤나 블레어(Anna Blair)라는 여교수로부터였다. 그녀의 편지 내용은 내가 거할 곳은 물론 일할 곳과 학비 보조를 해주겠다는 확약을 한 로터리 클럽이라는 단체가 있으나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너무 늦게 서신을 보내 미안하다"는 글과 함께 재정보증서를 따로 동봉해 보내왔다. 뛸 듯이 기뻤다.
재정보증서를 확보하고 나니 뭔가 일이 잘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더 큰 난관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병적증명서였다. 나는 병적증명서는 고사하고 호적등본조차 뗄 수 없는 '무적자' 신세였다. 다행히도 호적등본은 경복고 친구 부모의 '빽'을 통해서 얻기는 했으나, 학생 신분으로 지냈던 처지에다 '북의 형제와 친구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군대를 기피해 왔던 터라 병적증명서를 손에 쥘래야 쥘 수가 없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극약처방'을 하기로 작정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빽과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대학 입학이나 졸업도 연줄이나 돈으로 해결하던 때였으니, 병적증명도 안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서 일하며 장래 학비로 모아 두었던 돈을 몽땅 꺼내서 아는 사람으로부터 소개받은 병무청 직원에게 찔러 주었다. 그러나 "문제 없이 해주겠다"던 그 병무청 직원은 차일피일 미루더니 어느날 종적을 감춰 버렸다. 나중에 들으니 그는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했다.
장관 '빽'으로 병적증명서를 얻다 생명과도 같은 목돈이 하루 아침이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허탈감에 빠져 있던 어느날, 갑자기 6개월 전에 먼저 유학을 떠난 경복고 동창 친구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친구 아버지는 당시 세력이 대단하던 장관이었다. 나는 유학을 돕는다며 친구 집을 몇차례 방문하여 직접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간단하게 편지 한장만 써주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로 장관실을 찾아 갔다. 갑작스런 나의 방문을 받은 친구 아버지는 "아직 유학을 떠나지 못했느냐"며 의아스런 투로 물었다. 나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요즘은 편지 한 통으로도 안 통한다"며 그자리에서 병무청에 근무한다는 옛 부하 직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내 사정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내일 아침 병무청으로 아무개를 찾아가라'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와 몇차례 마주친 직원이었다.
다음날 병무청을 찾아가니 그 직원이 웃는 얼굴로 "학생 빽이 대단하더구먼!" 그러며 병적서류를 내밀었다. 늘 고압적이고 뻣뻣한 태도로 나를 대하던 그의 태도가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여권을 받기 위한 최대 난관 두 가지를 돌파했다.
당시 유학 목적의 여권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자격시험들을 보아야 했는데,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늘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몇 개월씩을 기다려서 한가지 시험을 치르고 나면 다른 시험을 보기 위해 또 몇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몇 개월에 걸쳐 문교부, 외무부 시험은 물론이고 대사관 시험까지 치렀는데 모두 무사히 통과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으나 유학을 가야 살 길이 열린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밤새워 공부한 결과였다.
수속을 시작한 지 무려 2년 만에 여권을 손에 쥐고 나니 무슨 특권을 갖게 된 것 마냥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 중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 여권을 소지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엇보다도 월남 후에 내 '존재'를 증명해 줄 만한 아무런 증명서나 서류가 없던 처지에서 정부가 발행한 여권은 그 의미가 각별했다. 비로소 한 사람의 대한민국 국민이 됐다는 사실 때문에 며칠을 들뜬 기분으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어느날 길을 가다가 경찰이 신분증 제시를 요구해 여권을 보여 줬더니 깍듯이 예를 갖추어 대하기에 지레 쑥스러 했던 기억이 있다.
수속 2년 만에 여권 받아, 그러나 비자는… 유여곡절 끝에 여권을 받았으나, 이제는 비자를 받는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권은 요령껏 재주를 부려 어찌어찌 해서 얻었으나, 미국행 비자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식 요령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며칠에 걸쳐 비자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어 영사관을 방문했더니, 대번에 "남한 주소지나 부모 형제나 친척이 없는 등 신분이 불확실하다"며 퇴짜를 놓았다. 한마디로 "당신 같은 처지의 학생이 미국에 가면 안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여권을 내밀며 사정을 했으나 역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침 유엔한국재건단에서 우편취급일을 할 당시 외교행랑을 전달하며 얼굴을 익히게 된 사무직원이 있기에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했더니, 그 또한 "저 영사는 아직 당신 같은 처지의 사람에게 비자를 내 준 적이 없다"며 "앞으로 무슨 수를 동원해도 비자를 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낙심이었다. 그런데, 막 뒤돌아서 나오려는 내 등 뒤에다 대고 말꼬리를 흐리며 던진 한 마디가 귀에 맴돌았다. "도지사가 보증을 서주면 모를까…"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