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원대 아동복지학과 조교수 서영미씨,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계속 공부했다.
매거진군산 진정석
"태어나서 1984년생 교수 면접은 처음 보네요."
군산 호원대학교 강희성 총장이 영미씨에게 말했다. 영미씨도 조교수 면접은 처음이었다. 그 전에 영미씨는 국공립어린이집 교사 면접, 민간어린이집 원장 면접, 육아종합지원센터와 대전과학기술대학 겸임교수 면접 등을 봤다. 떨어진 적도 있고, 합격하기도 했다. 2014년 3월, 유아교육 현장에서 8년간 일한 영미씨는 31세 나이로 호원대학교의 최연소 조교수로 임용됐다.
익산시 춘포면, 영미씨가 나고 자란 마을엔 30여 가구가 살았다. 버스는 하루에 세 번만 다녔다. 마을 아이들은 통틀어서 10명. '부지깽이도 나서서 일손을 보탠다'는 농사철이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살뜰하게 살피지 못했다. 초등학생 영미씨는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엄마도 됐다가 선생님도 됐다. 아이들이 고집을 부리고 떼를 써도 짜증 나지 않았다. 영미씨는 말했다.
"이 다음에 커서 꼭 어린이집 선생님 할 거야."중학생이 되자 동네 아이들과 놀 여유가 없어졌다. 춘포에는 초등학교만 있었다. 중학교부터는 오전 6시 50분 첫차를 타고 익산 시내로 다녔다. 영미씨는 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짬짬이 한국화를 배웠다. 상도 여러 번 타고 소질 있다는 칭찬도 받았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그런 거 하면 밥 못 먹고 살아서 안 돼"라고 했다.
고등학생 영미씨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였다. 성적이 우수하지 않았지만 가고 싶은 대학은 뚜렷했다. 4년제 대학의 유아교육학과. 봉사활동을 할 때도 꼭 어린이집에 신청서를 냈다. 청소를 돕고, 보조교사 역할을 맡았다. 대학에 가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임용고시에 합격해서 병설유치원 교사가 되는 게 꿈이었는데 바라던 대학에는 못 갔다.
"3년제나 4년제나... 임용부터 보자 생각했죠" "3년제인 원광보건대학 유아교육과에 갔어요. 어차피 전문대하고 4년제 사범대하고 자격증은 똑같으니까 빨리 임용고시를 보자고 생각했죠. 대학 들어가니까 공부가 저하고 딱 맞더라고요. 수학이랑 과학 같은 게 없으니까 날아갈 것 같았어요. 다 좋았어요. 실습 나가서 '어떻게 해? 잘못 온 것 같아' 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저는 재밌더라고요."
그녀는 성적 장학금을 받아서 학비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성인이니까 생활비는 스스로 벌고 싶었다. 고3 입시가 끝나고부터 방학 때마다 큰 규모의 레스토랑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했다. 한꺼번에 여러 개를 드는 접시가 무거워서 손목이 시렸지만 사람들 만나는 게 재미있었다. 레스토랑에 식재료를 납품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지고 음료 가격도 알았다.
대학 3학년 여름 방학, 영미씨는 생과일주스를 팔기로 했다. 창업자금 30만 원은 믹서기 두 대를 사는 데 썼다. 아이스박스는 집에 있는 것을 갖고 다니기로 하고. 자리를 물색했다. 익산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있는 한 가전제품 대리점, 점장을 찾아갔다. "학비 마련하려는 학생인데 전기 좀 끌어 쓸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라고 하셨어요. 오전 10시에서 오후 7시까지 장사를 했는데 접었다 펴는 테이블 위에 믹서기랑 얼음 가는 걸 놓고 시작했어요. 한 잔에 1000원인데 하루에 보통 250잔은 팔았어요. 비가 오면, 대천해수욕장에 가서 폭죽을 팔았고요. 장사 끝나고 집에 가서는 무조건 사과 박스에다가 그날 번 돈을 부어놨어요. 하나도 안 꺼내 썼어요.장사하면서 생각해봤죠. 학교 졸업하면, 어린이집 교사로 평생 살 거잖아요. 노점상은 두 번 다시 못해 볼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더 신나게 두 달 동안 했어요. 마지막 날에는 사과 박스에 든 돈을 방바닥에 쏟았어요. 보기에는 엄청났는데 재료비랑 이것저것 빼니까 큰돈은 아니었죠. 제 노점에 와 준 친구들이랑 밥 먹고 여행 갔어요." 아버지 몰래 다닌 대학원... '좋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