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꽃잎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황보름
'4.3 사건'. 나는 제주에 오기 전 4.3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지슬>이라는 영화가 이 사건을 다룬다는 것 외에 또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고통이 있었다는 것. 슬픔이 있었다는 것. 죽음이 있었다는 것. 이렇게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제주에 오고 나서 몇 번 4.3 사건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고, 이번처럼 사건의 현장을 지나게 된 적도 있었다. 질문을 통해, 스마트폰 검색을 통해 그때의 일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터진목을 지나게 된 거였다. 궁금했다. 그렇다면 그때,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제주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그 학살의 양쪽 편에는 공산주의자를 토벌하겠다는 토벌대와 폭압적인 경찰과 미 군정, 단독정부를 반대하던 무장대가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사이에 너른 들판에는 물일하고 밭일하던 제주도 사람들이 있었다. 이념 전쟁 속에서 허망하게 죽은 제주도 사람은 3만 명이나 되었다.
토벌대의 진압 도중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수십 명, 수백 명이 되는 마을 주민들이 한꺼번에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라진 마을을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을'이라 불렀다. 제주를 도보로 여행하다 보면 '잃어버린 마을'이란 표지판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제주에서 태어난 허영선 시인은 그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겠느냐. 초토화 속의 그 학살극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느냐.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할 뿐이다. 그날 이후, 마을의 봄은 사라졌지. 팽나무 그늘 아래 수백 년 모여 정을 나누던 이웃 삼촌, 한 마을 한가족이었다. 목축과 농사를 천직으로 삼던 사람들, 박한 농사일도 서로서로 '수놀음(품앗이)'하며 살던 오래된 마을들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영원한 사라진 마을이 되었구나. -본문 중에서1948년 4월 3일, 한라산과 오름이 불에 타올랐다.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이에 당황한 토벌대는 즉각 민중을 탄압했다. 무장대를 축출한다는 명목하에 마을 주민들을 죽여나갔다. 사람들은 밭일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고, 무서워 도망가려다 붙잡혀 맞아 죽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에 있는 자는 모두 폭도로 규정해 총살한다는 발표문이 나왔다. 1948년 11월 17일, 정부는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느닷없이 폭도로 규정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겁에 질려 몸을 바짝 숙인 채 살기 위해 산으로, 동굴로 도망쳐 들어갔다. <지슬>에 나오는 순박한 주민들도 그렇게 동광리에 있는 '큰넓궤'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러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거였다. 허영선 시인은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안이 생겨나고, 눈앞에서 희생되는 부모를 지켜보는 아이들, 어린 것의 죽음을 앞세운 부모들도 있었다. -본문 중에서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던 토벌대의 잔인한 진압은 7년간이나 이어졌다. 1954년이 되어서야 제주도민들은 서슬 퍼런 공포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제주도민들은 '연좌제'라는 또 다른 공포를 맞닥뜨려야 했다. 억울하게 폭도 낙인이 찍혀 죽어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공산주의자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2003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를 향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리고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했다. 이어 2014년 정부는 4월 3일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한다.
이제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3만 명의 영혼이 마음 편히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당신들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라도 외쳐주는 것뿐일 테다. 그리고 이 섬을 계속 '평화의 섬'으로 지키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성산 일출봉의 아름다운 자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