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 상황 문이 잠겨있더라도 바깥에서 세게 밀면 그대로 밀리는 문이었다.
정효정
'어차피 도움을 청할 곳은 없다. 나는 혼자다.' 판단이 든 순간 카메라 가방 앞주머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찾아 움켜쥐고 문으로 뛰어나갔다. 나이프라고 하니 무슨 흉기 같지만, 사실은 10년을 함께 여행해 온 1000원짜리 과일 깎는 칼이다.
"당신 누구야? 뭐하는 거야?"문 앞에 선 남자는 50대 정도의 마른 러시아인이었다. 술이 많이 취한 듯 한 그는 자기 열쇠를 들어 보이며 방을 잘 못 찾았다는 둥 횡설수설 하더니 떠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카운터로 뛰어 내려갔다.
"방에! 남자가 들어왔어!"결국 그 새벽에 4층에 있는 방으로 옮겼다. 방 상태는 아까보다 나쁘지만 방문은 튼튼하다. 문을 잠그고 나자 이제 현실감이 든다. 운이 나빴다. 운 나쁘게 취객이 방을 잘못 찾아왔고, 하필 운 나쁘게 문이 고장나 있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잠을 자고 있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러나 운이 좋게도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 '쥐 때문'이었다. 아니, '쥐 덕분'이었다. 그러자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마신 순간처럼, 내게도 큰 깨달음이 왔다. 아까는 방에 나타난 쥐 때문에 울먹였는데, 지금은 쥐가 마치 수호천사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이젠 별 게 다 사랑스럽구나' 싶어서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여행을 하다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게 외롭기도 하고, 어이없는 상황이나 힘든 순간을 맞기도 한다. 그럴수록 낯선 이의 따뜻한 손길, 눈빛 하나도 소중하고 귀해서 오래 간직하고 싶어진다. 오늘은 그게 낯선 쥐였을 뿐이다. 나는 크래커를 하나 뜯어 방구석에 곱게 놔 두었다. 이 방에도 있을 수호천사를 대접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