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황궁인 자금성의 내부.
김종성
명나라 역시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자국과 일본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적어도 대동강 이남이나 임진강 이남에 일본이 묶여 있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이 많으면 많을수록 일본의 명나라 침공이 그만큼 지연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게 최선이지만, 그게 안 된다면 차선책으로 대동강이나 임진강 이남으로라도 쫓아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게 명나라의 입장이었다. 이런 입장은 일본과의 휴전협상 과정에서 그대로 표출됐다.
이런 전략을 갖고 왔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태도에는 이중적인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일본군을 격퇴하려고 하는 것 같으면서도 일본과의 타협을 끊임없이 모색하는 모습이 조선 정부의 눈에 포착됐던 것이다.
그 같은 명나라의 태도는 일본과의 협상을 주도한 명나라 사신 심유경의 태도에서도 드러났다. 음력으로 선조 25년 12월 3일자(양력 1593년 1월 5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군과의 회담에서 "평양을 명나라에 내줄 테니 대동강 이남을 일본이 가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안을 심유경은 뿌리치지 않았다.
심유경 역시 대동강 이남을 일본에 할양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점은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입으로도 증명됐다. 선조 25년 12월 12일자(1593년 1월 14일자) <선조실록>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명나라는 국가 말기적 징후들을 노출하고 있었다. 재정위기에 봉착한 상태에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투에 전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적대세력들을 응징하는 데 힘을 쏟아야 했다. 명나라는 일본이 자국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전쟁을 가급적 빨리 끝내는 게 유리했다. 그래서 조선 영토의 할양까지도 고려했던 것이다.
물론 명나라한테는 조선 영토의 할양을 고려할 권한이 없었다. 그럴 권한도 없었고 힘도 없었다. 그런데도 조선 영토 할양을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지휘권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명나라가 전시작전통제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전작권을 보유하다 보니 조선 영토 처분권에까지 눈길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명나라는 대동강 이남을 일본에 주고서라도 전쟁을 종결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그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교감이 오가던 시기에 조선인들은 전쟁 수행에 대한 의지를 강렬하게 표출하고 명나라 군대를 전쟁터로 끌어냈다. 만약 조선인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조선 땅은 북위 39도 이북(대동강 이북)으로 축소되었을 것이다.
'대동강 이남 할양'은 조선군이 명나라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수복하고 뒤이어 남진을 단행함으로써 물 건너갔지만, 조선 영토 할양을 향한 명나라·일본의 음모는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 후로는 조선 팔도의 절반을 놓고 휴전 협상을 벌였다. 대략적으로 북위 38도 이남을 일본 영토로 인정하는 선에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움직임을 벌였던 것이다. 명나라는 전투 때는 조선군과 연합하고, 협상 때는 일본군과 연합하는 이중적인 나라였다.
하지만, 명·일 휴전협상은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타격을 받았다. 한강의 요충지인 행주산성에서 권율 부대가 일본군을 대파함에 따라, 조선 팔도의 절반을 일본이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행주대첩 때문에 분노한 것은 일본뿐만이 아니었다. 명나라도 격노했다. 자국의 협상 전략에 타격을 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권율 장군에게 경고를 표시했다. 일본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고한 것이다. 일종의 레드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명나라가 그렇게 했다는 점은 선조 26년 3월 28일자(1593년 4월 29일자) <선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나라의 동맹국이 조선인지 일본인지 헷갈리게 하는 대목이다.
조선은 어떻게 해서든 '명·일 연합군'의 조선분할 계획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두 나라의 휴전 협상은 행주대첩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됐다. 두 나라 사이에는 '일본은 명나라에 조공하고 명나라는 조선 땅을 책임지고 일본에 넘겨주는 방안'을 두고 협상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일본이 자국의 속국이 되고 자국을 위협하지만 않는다면 조선 땅 일부가 일본에 넘어가든 말든 신경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