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유영 판사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취소소송 결과
김용국
하지만 1년 뒤 서울고법(제7행정부 재판장 곽종훈 부장)은 1심을 뒤집고 고인의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라고 판단한다. 재판부는 ▲ 망인의 재판건수(총 7건, 54명에게 징역형 선고)는 상위 10%에 달하는 점 ▲ 사건 내용들이 의열단 사건, 한국혁명당, 소작쟁의사건 등 항일투쟁이었던 점 ▲ 상당수가 독립운동 공로로 훈·포장을 받은 점 등을 지적했다. 또 법원은 ▲ 실형을 받은 이수택 등 여러 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점에 비추어 항일운동가를 탄압하는 판결로 분류함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고인은 배석판사에 불과했다"는 유족들의 주장에 대해 법원은 "재판 당시 실제로 피고인들의 처벌을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는 등 특별한 사정을 인정할 증거가 없는 이상 배석판사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적극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일제의 훈공만으로 친일로 분류할 수는 없다는 항변에 대해서도 "망인이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훈4등 서보장을 받은 것은 25년이라는 긴 재직기간 내내 조선총독부의 재판소 운영 정책에 적극 호응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반박했다. 유족은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상고 기각을 면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판사로 일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딱지를 붙여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식민지의 판사가 되지 않겠다며 법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목숨을 잃은 독립투사와 일제시대 법조인으로 부와 권세를 누린 인사가 사후 역사적 평가에서도 차이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례로 박상진(1884~1921) 선생은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최초로 실시한 판사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발령이 났으나 취임을 거부했다. 대신 대한광복회 총사령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이끌던 선생은 1919년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사형이 집행돼 순국했다.
정말로 부끄러운 건 친일이 아니라, 친일행위를 하고도 뉘우치거나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참고로, 이 사건에서 친일행정을 한 '선배판사'에게 관대했던 1심 재판장은 현 정부의 법무비서관까지 지냈다.
[판결 2] 친일파후손 땅찾기 사건"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헌법의 각 조항이 인간의 존엄성, 행복추구권, 주거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 권리를 지켜주는 반면, 전문은 일종의 장식정도로 여겨진다. 그런데 헌법 전문에 기댄 판결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다.
[사례 2] 이근호는 을사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군부대신)의 형이었다. 이근호는 중추원 부의장, 법부대신을 지냈고 을사조약 이후엔 본격적인 친일활동을 했다. 그는 한일강제병합 당시 형제인 이근택, 이근상과 함께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고 형제는 은사금 명목으로 합계 10만엔(현재 가치로 약 20~60억 원)을 받았다. 이근호는 1923년 사망하여 남작 작위와 은사금 등 상속재산은 아들을 거쳐 손자 이아무개씨에게 상속되었다. 이씨는 국가 소유로 되어 있는 오산시 궐동 소재 토지 737㎡(약 223평)가 조부 이근호의 땅이므로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일제 강점기 작성된 토지조사부에는 이 땅이 1911년 이근호가 사정(査定)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국가는 1959년에야 이 땅에 소유권보존등기(미등기 부동산에 최초의 소유자를 표시하는 등기)를 마쳤다. 법원의 판례는 등기부에 기재된 소유권보다 토지조사부에 등재된 토지사정의 효력을 우선하였다. 이것을 뒤집을 만한 특별한 입증을 못한다면 토지는 이근호의 상속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 형사처벌, 재산환수 등 청산작업 무산이런 일이 가능한 건 한국 현대사에선 친일 부역자 형사처벌이나 재산환수 등 청산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처벌법(반민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구성되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6.25가 일어나자 반민법은 폐지되고 말았다. 친일파에 대한 형사처벌 뿐 아니라 친일파 재산을 환수하거나 취득을 제한할 민사상 조치도 어려웠다.
이 맹점을 이용해 적지 않은 친일파 후손들이 조상땅 찾기를 시도하였다. 실례로, 1997년 이완용 후손들이 낸 토지 반환소송의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반민족행위자나 그의 후손이라고 하여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재산권을 박탈하거나 법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 판결로 이완용의 후손은 당시 시가 30억 원 상당의 토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 사건을 맡은 1심인 수원지법(이종광 판사)은 법원이 친일 부역으로 획득한 재산까지 지켜주어야 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법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먼저, 헌법 전문의 3.1운동의 독립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 "선언적인 의미 뿐 아니라 규범적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시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국회는 반민법의 폐지 이후 친일파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하지 않고 있다"며 국회의 의무 방기를 지적했다.
친일파 재산권 제한할 법률이 없다...판사의 선택은?걸림돌은 그뿐 아니었다. 설령 국회가 법을 제정한다고 해도 소급입법금지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있었다. 헌법 13조 2항은 "모든 국민은 소급입법에 의하여 참정권의 제한을 받거나 재산권을 박탈당하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판사는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을 반란, 내란죄로 처벌한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5·18특별법)에서 답을 찾았다.
5·18특별법 2조는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하여 해당 범죄행위의 종료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은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으로 본다"고 하면서 소급입법을 용인했다. 이 조항은 헌법재판소까지 갔지만 합헌으로 결론이 났다. 헌재는 소급입법 금지 원칙을 제시하면서도 예외적으로 "심히 중대한 공익상 이유가 있는 경우" 등에는 소급입법이 허용된다고 판시했다.
이 판사는 ▲ 친일파들 때문에 헌법이념이 파괴되고 수백만 조선민중의 자유와 인권이 억압되는 등 고통과 해악이 너무 심대했고 ▲ 초대 국회에서 반민법을 제정, 시행한 바 있어서 일반국민들이 재산을 국유화하는 소급입법이 있으리라는 사정을 예상할 수 있었으며 ▲ 헌법 정신과 민법 소유권 사이의 법적인 혼란상황에서 친일파나 후손들의 재산권을 보호할 가치가 적은 반면 ▲ 입법을 정당화하는 국가적, 민족적 이익은 중대하고 절실하다는 점을 소급입법 근거로 들었다.
친일파 후손 재산권 제한은 '평등의 원칙' 위배? 이 판사는 "친일파 후손이라는 이유로 재산권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판사는 일제가 패망한 뒤 "일본 정부의 재산은 미군정을 거쳐 전부 대한민국 소유로 귀속된 후 불하를 거쳐 일반 국민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는 "신생독립국인 대한민국과 헌법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정부나 친일반민족행위자 모두 헌법의 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면서 따라서 "이 사건 토지도 당연히 국가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 법적인 평가에서 오히려 평등한 대우"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일제 강점기 남작(男爵)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이근호는 헌법이념을 부정했는데도 민사법에 따라 사유재산인 토지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헌법으로는 3·1운동 정신과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법률은 친일로 획득한 재산도 사유재산으로 인정하는 '법체계의 혼란 상황'에서 이 판사는 돌파구를 찾는다.
"법관은 법률에 의하여서뿐 아니라 '헌법'에 의하여서도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헌법 103조)할 헌법상 의무가 있다."이종광 판사 "친일재산 환수법 만들 때까지 재판 정지"